|
이유 없이 아팠다는 말은 사실 거짓말이었다. 돌아보면 항상 이유가 있었다. 애쓴 만큼 알아주질 않는 야속한 세상이 있었고, 모질고 서러운 말을 쏟아내는 친구가 있었다. 이별을 선언하는 연인도 있었고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를 채우지 못한 내가 있었다. 그 모든 일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곤 했다. 공교롭게도 늘 아홉 즈음이었다. 어쩌면 애꿎은 숫자에 책임을 떠넘기려 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아홉 수’라는 말은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우리 안의 오래된 ‘집단 믿음’에 가깝다. 스물아홉 살이라고 해서 결혼을 망설이거나 서른아홉 살이라고 해서 이사를 미루는 일은 거의 사라졌지만 여전히 튀어나오곤 하는 ‘이왕이면’이라는 한마디에 담긴 뚝뚝 묻어나는 미련들. 하지만 그보다 더 보통의 우리를 멈칫하게 하는 건 재수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1에서 2로, 다시 2에서 3으로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데서 오는 은근한 파장이자 부담감일 때가 더 많다. 인생에 어떤 마디가 있어 때론 넘어지고 때론 급격히 바뀌기도 한다면 그 숫자들이야말로 가장 직접적으로 삶을 나누기도 하니까. 늘 단단하게 버티고 있던 대학이라는 문, 불안하기만 한 직장과 아득한 남의 이야기처럼 요원한 결혼. 거미줄처럼 방사선으로 뻗은 채 얽혀 나가지만 언제 툭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얇아지는 관계들. 지루함. 방황. 고민. 좌절. 단절. 그래서 어느덧 각각의 아홉은 성인들이 겪는 제2의, 제3의 사춘기가 됐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 날카롭게 몰아세우는 것이다. 열아홉 살을 지나 스무 살이 되면, 스물아홉 살을 건너 서른 살이 되면, 서른아홉 살을 넘어 다시 마흔 살이 되면 어제 느낀 감정이 더 이상 그대로일 것 같지 않아서 말이다. 이 모든 실타래의 근본을 묻는다면 나이어야 할 것만 같아서. 그래서 아홉은 단단하게 속이 찬 어느 시기의 정점이자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도전의 숫자다. 우울하게 바닥을 보고 걸을 이유도, 서러워할 이유도 없다. 아홉은 꾹 이를 악물고 뛰어넘어야 할 산이 아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자 오늘과 같은 내일의 연속이다. 아홉이라는 숫자와 함께 겪게 되는 잠깐의 미열은 마땅히 아름다워야 할 열아홉 살의 봄과 스물아홉 살의 여름과 서른아홉 살의 가을을 맞기 위한 성장통일 뿐이다.
SWEET NINETEEN BLUES 19 열아홉 살과 스무 살 사이의 강 19세 겨울, ‘20세’이라는 말이 거느리는 수많은 의미들의 조합 속에서 나는 당혹스러웠다. 20세는 닿을 수 없는 나이 같았고, 그 세계에 진입한 순간 무엇인가가 아주 달라지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었다. 문단 선배인 모 시인은 “우리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거나 야동을 보기 위해 19년을 기다려야 하는 건 너무 끔찍한 일이야. 세상 모든 경험을 해보기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을 참아내야 하다니”라고 했었다. 물론 그 전에도 성인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 이를테면 화장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일들을 하지 않고 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의 화장이나 옷은 물리적으로 더욱 성숙해 보이기 위한 것들이었다. 지금은 바르지도 않는 파운데이션에 세미 정장 같은. 한번은 학교 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서 얼굴이 낯익어 인사를 건넸는데 친구들과 다니던 동네 술집의 주인 아주머니었던 적도 있었다. 교복 입은 내 모습을 보며 어이없어하던 아주머니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뭐가 그렇게 급하고 궁금해서 그런 것들을 미리미리 해치우듯 해보았는지. 생각해 보니 나의 10대는 그야말로 ‘뭔가 빠진 자리’를 채우려 급급했던 시간이었다. 어려서부터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남다른 소유욕이 있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나이를 한 살씩 먹는다는 것은 소중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잃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떠나가거나 없어지거나 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빈자리가 생기는 것 같으면 그 자리를 바라보며 어찌할 줄 몰랐다. 그래서 매일 일기를 쓰고 사진을 찍고 시를 끄적이면서 자꾸만 무언가를 뒤에 남기며 가려고 노력했다. 흘러가는 시간들을 붙잡아서 기록해두려는 마음이었나 보다. 사람을 만날 때 특히 연애를 할 때는 상대방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 내 안에 있는 근본적인 허전함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 사람 역시 언제나 나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기를 원했고. 그러나 채우려 시작한 연애는 더욱 허전한 구멍을 남긴 채 나를 통과해 빠져나가곤 했다. 둘러보면 인연의 밖에 있기에 멀고 묽어진 자리들로 가득했다. “우리가 창조되는 과정에 뭔가 실수가 있었다네/우리에게는 뭔가 빠져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딱히 말하기는 어렵군/그렇다고 그것을 찾겠다고 서로의 내장을 파헤쳐볼 수는 없지/그것 때문에 육신을 찢어 놓아서야 되겠는가?” -게오르그 뷔히너, <당통의 죽음> 게오르그 뷔히너의 희곡 <당통의 죽음>을 읽으며 인연에 대해 생각하는 건 그만큼 먼 일이다. 24세에 요절한 이 천재 극작가는 우리가 품고 있는 근원적인 ‘실수’, 빈자리에 대해 따뜻한 긍정의 시선을 보낸다. 우리는 결핍 때문에 상대의 육신과 마음을 찢어놓기도 하는데 말이다. 뷔히너가 말하는 ‘무엇인지 딱히 알 수 없는’ 빈자리가 나와 상대로 하여금 서로를 파헤치고 상처내게 했던 것이다.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해 서로의 가슴에 구멍을 내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에 아픈 눈을 내줘야 했을까? 어릴 적 좋아했던 동화가 있었다. 동그라미가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길을 떠나는 이야기. 그런데 막상 자신에게 맞는 조각을 찾아 완벽한 동그라미가 되고 나니, 오히려 주위의 아무것도 살피지 못한 채 그저 빠르게 굴러가야 할 뿐이었다. 데굴데굴. 데굴데굴. 결국 동그라미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완벽한 조각을 길에 내려놓고 다시 노래하며 천천히 길을 떠난다. 사람과 인연에 관한 우화로 이 동화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우리가 통과해야 할 어찌할 수 없는 지점들을 향해 데굴데굴 굴러가는 동그라미의 이미지는 어린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아아,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저런 것이구나.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대책 없이 굴러가는 것, 더 이상 돌아볼 것도 빛나는 것들도 없이….’ 하지만 그때의 나는 동그라미가 왜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20대가 되고 나서 10대를 돌아보니 무언가를 채우고 기록하기에 급급했던 나의 마음이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헤매는 동그라미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그라미의 빈 곳은 그냥 비워둬야 할 자리였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여행은 아이러니하게도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완벽해지는 순간 엉망이 되고 만다. 빈 곳을 빈 곳대로 놓아둘 수 있다는 것이, 무언가로 애써 채우는 것보다 더 풍요로울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마음의 빈 곳은 결핍이 아니라 사람의 풍경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인데 그곳을 억지로 채우려 하거나 들어가려 하면 모든 존재가 기울어지고 말 것이다. 뷔히너와 동화의 결론을 섞어 말하면 빈자리를 채워줄 완벽한 짝을 찾으려 상대를 찢어놓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상대가 나를 모두 채워주기를 바라는 것은 내가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내부의 질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일 테니까. 잃어간 자리도 떠나간 자리도 아닌 그 자리는 그저 빈 곳. 그건 마치 모래시계가 자신의 반대편에 아름다운 무늬의 성을 쌓아가는 것과 같아서, 우리는 그 빈 곳으로 인연을 받아들이고 비우고 다시 채우는 것이다. 시계 숫자판이 덜컥 소리를 내며 새로운 한 해를 알릴 때, 누군가에게는 19세에서 막 20세로 넘어가는 그순간, 무슨 천지개벽이나 일어난 것처럼 한순간에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나는 ‘19’와 ‘20’이라는 숫자 사이에 분명 따스한 틈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틈은 생각의 유예(猶豫) 지점 같은 것이다. 다시 한 번 내가 발 디딘 곳을 살펴보고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그 지점을 넘어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고, 고민과 생각의 무게에 따라 자신을 더 넓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누군가를 모두 가지려 하거나 뭔가를 애써 채우려 급급해하는 버릇을 많이 버리게 됐다. 오히려 반쯤 흐린 얼굴로 안겨오는 빈 팔이 좋아졌다. 점차 파운데이션을 바르지 않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을지? 두꺼운 화장이 사라져간 자리를 대신해 마음속에 누구든 언제나 편안하게 앉았다 갈 수 있는 의자 하나를 품고 싶다. 한 점 시간에 함께 고여 있다는 것, 누군가의 물가에 앉아 함께 저녁을 보낼 수 있다는 것.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그런 줄도 모른 채 음악을 나누고 한 병의 와인을 따며 그렇게 헐겁게나마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려 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이고, 따라서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으니까. 계절을 통과하고 사람을 건너 먼 별을 찾아가는 시간 속에서, 그저 따스하게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는 것에 기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기가 애타게 찾던 잃어버린 조각(Missing place)을 내려놓고 다시 길을 떠나는 동그라미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던가. WORDS 이혜미(23세,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