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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산다

하나밖에 모른다. 한 번에 한 가지밖에 생각할 줄 모르고 그 하나에 빠져들고 재미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다. 지금은 그게 연기다. 이제 그는 김기범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오래 배우로 기억되려 한다.

프로필 by ELLE 2011.10.11



화이트 스트라이프 셔츠는 Jill Stuart New York, 블랙 베스트와 재킷은 Dior, 팬츠는 John Galliano, 행커치프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나뭇잎 펜던트는 Jamie & Bell.

one day
연습생 시절. 숙소까지 15분 남짓한 거리를 오가며 그는 자신에게 캐릭터를 부여하는 걸 즐겼다. 자, 오늘은 ‘건달’을 해보자, 껄렁거리며 건달처럼 투덜거려도 보고 또 어떤 날은 오직 공부만 할 것 같은 ‘범생이’ 모드로 그 짧은 길을 오가곤 했다. 그건 말하자면 사랑이었다. 연기라는 실체도 없이 막연한 대상이어서 오히려 어렵기만 했던. 하지만 풋사랑이 늘 그렇듯 절절했다. 열정은 넘쳤으나 방법은 몰랐다. 멈출 줄도 몰랐다. “한 3년쯤 됐을 때였나, 어느 날 문득 하늘을 보다가 깨달은 적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단 하루도 배우에 대한 생각을 놓고 산 적 없구나. 그렇구나. 내가 굉장히 좋아하긴 하는구나. 생각해 보면 그때가 더 심했다.”




블랙 시스루 셔츠는 Dior, 스티치 장식 블랙 수트와 보타이는 John Galliano.

4년 전, 슈퍼주니어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는 까칠한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선 어른스런 느낌을 주는, 쉽게 옆자리를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천천히 생각을 고르며 타박타박 대답을 오래 이어갔다. 그가 연기에 꽂혀 있는다는 걸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한동안 그를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다. 연기자인 동시에 가장 잘나가는 아이돌 ‘슈퍼주니어’ 멤버이기도 했던 김기범은 갑자기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일일 드라마였던 <춘자네 경사났네>를 하고선 굉장히 많이 힘들었다. 연기를 한다기보단 아무 생각 없이 대본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회사에 쉬겠다고 했다.” 변화가 필요했고 준비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혼자 공부도 하고 여행도 다녔다. 재충전하며 1년 정도 쉬고 들어간 작품이 영화 <주문진>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판타지적인 요소에 묻혀 정작 보여주고 싶었던 자신을 드러내는 게 불가능했다. 안 되겠다, 다른 걸 시도해야겠다 싶었다. 이번엔 연극에 도전했다. 뮤지컬이 아닌 연극 무대에 서기란 SM 아이돌로서는 최초의 시도. 영화감독들이 연출하는 ‘연극열전’ 시리즈 가운데 허진호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물리도록 연극을 보러 다녔다. 그러고도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화이트 니트와 그레이 팬츠는 모두 Burberry. 안경은 Ermenegildo Zegna by 세원.

today, maybe tomorrow
김기범은 여전히 슈퍼주니어 멤버지만 영화와 드라마만 여덟 편의 작품을 마쳤다. 그리고 여전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연기 생각을 한다. 그런 그가 3년만의 컴백 작품으로 고른 것은 세종대왕과 훈민정음을 둘러싼 이야기로 하반기 최고 기대작으로 꼽히는 <뿌리깊은 나무>의 집현전 학사이자 사육신인 박팽년 역할이다. 오랜만의 촬영현장은 생각처럼 드라마틱한 변화가 느껴지진 않았다. 평소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리얼리티가 있는 영화들을 즐겨보다가 갑자기 사극을 하려니 발라드 가수가 댄스를 하는 것처럼 어색한 느낌도 들었다. 사극 특유의 대사 처리를 익히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한석규, 장혁, 윤제문 등 쟁쟁한 선배들과 현장의 에너지가 주는 자극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다. “현장에 합류해 보고 바로 알았지. 일단 넘을 수 없는 벽이구나. 와, 내가 호랑이 굴에 들어왔구나 싶고 이번 드라마를 제대로 해내면 사극이라는 장르가 그만큼 편해질 것도 같다.” 전에 비해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재미있다는 것. 생각만큼 쉽지 않지만 잘하는 걸 떠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알고 한다는 느낌이 그를 쉴 새 없이 움직이게 만든다.



트렌치코트는 System Homme.

분명한 건 적어도 지금은 연기만큼 강렬하게 그를 붙잡는 존재가 없다는 거다. “하나만 계속 들이 파고 한 번에 두 가지를 좋아하지 못한다. 운동하는 시기가 있으면 운동만 딱 하고, 연기 공부 한다고 생각하면 딱 연기만. 연기 공부 하다가 두 시간 후에 운동 가고 또 촬영 가고, 이런 거 못한다. 남들이 여러 가지 할 때 나는 잘하는 거 하나만. 연기도 그래서 쉬었다. 연기가 재미없어지려 해서. 오래 기다렸지만 딱 재미있을 때 다시 나왔고. 사실 이 마음이 언제까지 갈지 몰라서 불안한데. 그래도 10년은 가겠지.” 스무 살 무렵엔 오히려 10년 뒤를 바라보고 살던 김기범은 조금 달라졌다. 오직 오늘과 내일을 살 뿐이다. 오래 남을 배우라는 꿈을 꾸긴 하지만 막연한 미래에 어떤 배우가 돼야겠다는 생각도 솔직히 해본 적 없다. “문득 돌아보니 너무 고지식하고 재미없는 거다. 내가 왜 20대 때부터 10년 뒤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나 싶고. 지금 목표는 20대를 20대스럽게 사는 것,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다. 미래를 바라보는 건 서른에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 같고 지금은 질주해야 할 시기인 것 같아서.” 그래서 그는 당분간 <뿌리깊은 나무> 하나만 바라보려 한다. 그 후의 일은? 당연히 끝나고 나서 생각하기로 한다.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0월호를 참조하세요!


Credit

  • EDITOR 박소영
  • PHOTO 오중석
  • ELLE 웹디자인 김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