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엄마, 누나, 딸 말고 동료 시민으로서의 여성 #엘르보이스

여성을 사회 구성원 그 자체로 공감하고 존중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BYELLE2021.05.11
 


가족 너머 우리
 
얼마 전 대형 서점에 전화를 걸었다가 연결 대기 중 이런 안내 멘트를 들었다. “상담원에게 폭언을 하지 마세요.”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직설화법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전혀 다른 방식을 취했던 어느 공익광고 영상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화 연결음을 상담원 가족들이 직접 녹음하는 캠페인이었다. “지금 전화를 받는 상담원은 착하고 성실한 우리 딸입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우리 엄마가 상담해 드릴 거예요” 이런 내용이었다. 대부분 여성인 상담원들의 아버지나 자녀가 등장한 이 캠페인이 실행된 이후로 상담원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던지거나 욕설하는 사람들이 큰 폭으로 줄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함부로 대하려다가도 그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을 떠올리고 멈출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다. 그러나 실효가 있다는 데 대한 반가움과 별개로 이런 기획에 대한 씁쓸함도 남았다. 여성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존재할 때만 소중한 존재인가? 전화를 받는 것은 상담원의 업무인데, 공적인 직무 과정에서 받아야 할 당연한 존중과 보호를 위해 왜 가족이라는 사적인 관계를 끌고 와야 할까? 이렇게 연출되는 훈훈함이 ‘정상 가족’에 대한 이상화를 공고히 한다는 점 또한 불편했다. 세상에는 가족 없이 혼자인 사람도, 가족에서 분리되기를 결정한 사람도 있으며, 더 심각하게는 가족으로부터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소중히 여기는 가족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저 자기 자신으로서 소중한 존재다. 일하면서 폭언을 듣지 말아야 하는 건 누구에게나 당연하다.  
 
여성들은 공적인 자리에서도 종종 사적인 관계 속의 존재로 치환되고 축소된다. 똑같이 독립운동을 해도 남성들은 ‘열사’ ‘의사’ 칭호를 받을 때 왜 언제나 유관순 ‘언니’ ‘누나’였을까? 자신의 분야에서 굉장한 업적을 쌓은 여성 전문가나 예술가들도 나이가 많으면 ‘할머니’라는 타이틀로 불린다(주요 일간지에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에 대한 기사 제목을 ‘미국 대법관 할머니’로 뽑은 걸 보고 기절할 뻔했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는 여성 후보에 대해 상대 진영 후보가 ‘도쿄에 아파트 가진 아줌마’라고 언급하는 일이 있었다. 중년 여성을 낮춰 부르는 아줌마라는 호 칭은 여성을 공격할 때면 일단 튀어나오는 말이라 놀랍지도 않은데, 더 어이없는 건 같은 당의 선거대책위원장이 돕느라고 한 말이었다.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를 보살피는 마음가짐, 딸의 심정으로 어르신을 돕는 자세를 갖춘 후보입니다.” 능력과 성취를 부각해야 할 정치인에게조차 낡은 성 역할의 프레임을 씌운다. 이렇게 공적인 영역에서도 여성의 이름과 직함을 제대로 호명해 주지 않고 사적인 관계망에 가두는 것은 가부장제 사회의 오래되고 나쁜 습관이다. 여성을 일하는 개인으로 분리해서 바라볼 줄 아는 현대적 시각이 훈련되지 않은 것이다.
비슷한 씁쓸함을 느끼는 건 여성이 피해자인 폭력이나 성범죄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볼 때다. ‘내 여동생이나 누나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생긴다면 참을 수 없다’는 식의 댓글을 자주 접한다. 남성들이 겪을 만한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할 때, 이렇게 가족의 일로 대입하며 여성 대상 범죄의 잔혹함에 같이 분노하는 건 다행이다. 그러나 내 가족 가운데 여성 구성원이 없어도 공감하고 화낼 수는 없는 걸까? 단지 그 사건이 끔찍하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일이기에, 피해자들이 고통스러우니까… 이런 이유만으로는 부족한 걸까? 같은 사람으로서 그런 일을 겪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시민 사회의 동료 구성원으로 함께 싸워줄 수는 없을까?
 
가족보다 먼저 개인이 있다. 가족 형태가 다양해지는 시대 흐름은 구성원들의 개별성이 점점 더 강해지는 쪽을 향하고 있다. 누군가의 딸이, 엄마가, 아내가 아닌 여성도 얼마든지 존재하며 점점 늘어날 것이다. 그런 상상력을 기반으로 개인을 대하는 일은 예의의 영역이기도 하거니와 정확한 현실 인식에 더 가까울 거다. 그리고 누군가의 딸이나 아내, 엄마나 누나나 여동생이라는 이유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기를 바란다. 그렇게 여성이 여성이기에 겪는 차별과 폭력이 줄어든다면 결과적으로 어떤 개인이라도 살기 좋은 세상에 가까워질 것이다.
 
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저자이자 운동 애호가. 오랜 시간 잡지 에디터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