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화보도 그렇지만 많은 분야 중에서도 패션이 선사하는 특별한 감각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패션과 밀접한 관계로 지내며 겪은 일 중 가장 호사스러웠던 경험이 있나요. 피날레를 장식했던 2018 루이 비통 크루즈 쇼가 떠오르기도 하는데요
그 쇼, 정말 멋졌죠! 쇼가 열렸던 미호미술관으로 이어지는 터널부터 다리, 무대, 계단을 포함한 런웨이가 무려 700m에 달했어요. 마치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는 거대한 공연 같았죠. 최근 패션과 관련된 경험 대부분을 루이 비통과 함께하고 있는데요, 그중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제프 쿤스와의 협업했던 2017년이에요. 아트와 패션의 만남을 기념하며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방에서 300~400명 정도의 인원이 모여 저녁 식사를 했거든요. 20대 때는 모나리자 그림 한번 보겠다고 인파를 힘겹게 파고든 적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캐멀 컬러 코트와 볼드한 골드 체인 네크리스는 모두 Louis Vuitton.
오늘 입었던 의상 중에 슬로건 티셔츠도 있어요. 지금 배두나가 티셔츠에 넣고 싶은 문구가 있다면
직접 만들어 입은 적도 있어요. ‘예매는 필수’라고(웃음). 〈괴물〉 개봉했을 때일 거예요. 하지만 저는 ‘행동가(Activist)’의 자질은 없어요. 당연히 저도 제 가치관과 의견이 있고, 누군가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저에 대한 사전 정보를 관객이 많이 알고 있는 게 제 연기에 몰입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거든요. 어려운 문제예요. 하고 싶은 말이 담긴 작품이 있다면 그 작품 자체로 보여주려 해요.
맥시 사이즈의 트렌치코트와 슬로건 톱, 와이드 팬츠, 아일렛 블랙 벨트, 이어링, 플랫폼 펌프스는 모두 Louis Vuitton.
싸이월드의 부활 소식을 뉴스에서 보고 배두나가 떠올랐습니다. ‘미니홈피’ 감성에 큰 영향을 미친 당사자로서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은
지금 그 사실을 알았는데요. 싸이월드가 사라진다고 했을 때도 놀랐지만 아쉽지는 않았어요. 그 시절 즐거웠지만 나를 지나간 시간이라는 느낌이죠. SNS를 열심히 하고 있지 않은데 꽃꽂이나 자전거, 필름카메라처럼 제가 싸이월드에서 집요하게 갖고 놀았던 것이 지금도 인스타그램에서 사랑받는 걸 보면 재미있기도 해요.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보고 MC들이 당신의 데뷔작이 〈링〉이라는 걸 몰랐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당시 10대였던 저에게 배두나가 영화 데뷔를 한다는 건 아주 큰 뉴스였거든요
‘놀이 시리즈’를 사진 에세이집으로 냈던 게 당시 10~20대의 감성에 영향을 미친 부분도 있었을 거예요. 그때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로 할 수 있는 선에서 열심히 소통했으니까요. 초창기 팬이 아들 둘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면 함께 자랐다는 생각도 들고요. 제 팬들은 저와 좀 비슷해요. 약간 숫기는 없지만 썩 괜찮은 사람들이죠.
스터드 스트랩 장식의 크롭트 레더 재킷과 스트라이프 패턴의 톱, 그래픽 프린트 쇼츠, 필로 부츠, 지퍼 모티프 브레이슬렛, 버클 링, 체인 링크 링은 모두 Louis Vuitton.
옛날 이야기를 했지만 배두나는 과거보다 미래와 더 어울립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고요의 바다〉를 촬영하는 요즘, 구체적으로 상상한 미래의 풍경이 있나요? 2075년을 사는 우주생물학자 역할인데요
인간이 아닌 역할을 해야 했던 〈공기인형〉, 22세기가 배경인 〈클라우드 아틀라스〉 촬영 때도 오히려 설정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어요. 어디에 있어도 현실에 있는 사람처럼 보여야 하는데 내가 미래라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캐릭터가 붕 떠 보일 수 있어서요. 저는 지극히 현재 중심적인 사람이에요. 과거도, 미래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금에 집중하죠. 다만 조카들을 보면서 이렇게 영상과 친화적인 세대는 우리와 또 어떻게 달라질까, 어떤 감각이 발달할까 궁금해지기는 합니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아이엠히어〉에는 외국인의 시선으로 본 한국인의 여러 특성이 묘사되더군요. 직접 의견을 내기도 했을지
열심히 이야기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제게 먼저 의견을 구하면 대답은 하되 외국인들이 보는 서울과 한국의 모습에 대해 딱히 정정하려고 하지는 않아요. 어떤 나라든 ‘이 나라 사람들은 다 그래’라는 건 없잖아요. 다만 감독이 직접 와서 보고 느낀 것이 있다면 그렇게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때로극적으로 과장스럽게 묘사될 때도 있지만요.
현란한 프린트의 크롭트 톱과 빅 포켓 장식의 카고 팬츠, 플랫폼 펌프스, 지퍼 모티프 브레이슬렛, 버클 링, 체인 링크 링은 모두 Louis Vuitton.
촬영으로 해외에 오래 체류하는 동안 ‘진짜 난 한국인이다’라고 느낀 적도 많다고요
일단 저는 온돌 없이 살 수가 없고요(웃음). 프랑스식 인사인 ‘비주’에 적응하는 데 몇 년이 걸렸어요. 포옹도 마찬가지고요. 한국인은 우선 고개부터 숙이게 되잖아요. 겸손한 화법도 도통 안 고쳐졌는데 이제는 동료들도 제가 진짜 자신 없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죠. 그런데 이제는 한국에서 포옹 없이 인사만 하면 좀 덜 반가워하는 것 같아 괜히 섭섭해요. 허전하기도 하고.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특히 워쇼스키 자매처럼 성별이나 인종 같은 이분법적 경계를 없애려는 사람들과도 일했죠. 이런 경험이 개인에게 미친 영향은
2010년대 초반, 할리우드에 가기 이전과 지금의 저는 정말 많이 다른 사람이에요. 특히 〈센스8〉은 미국이나 유럽 주요 도시뿐 아니라 레이캬비크, 멕시코시티, 나이로비, 뭄바이 등을 오가며 촬영했고 현지 스태프뿐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동료들과 일했거든요. 홀로 경험하고 배운 것도 많지만 몇 년 동안 그렇게 지내다 보면 LGBTQ 등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에 자연스레 가까워지고 배우게 돼요. 마치 아이가 세상을 흡수하는 것 처럼요. 동의하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죠. 내 친구들은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는지, 우리와 뭐가 다른지 비교도 하고요
오버사이즈 점퍼와 스트라이프 패턴의 슬립 드레스, 그린 컬러 더비 슈즈, 쿠상 PM 백, 지퍼 모티프 이어링은 모두 Louis Vuitton.
다른 세상 어딘가에 나랑 잘 맞는 소울메이트가 있을 수 있다는 기대와 상상을 하나요
저는 그런 기대는 안 합니다. 나를 이해하고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때로는 나조차 내가 이해가 안 가는걸요. 여러 도시를 다녔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도 잘하지만 제가 평생 살 곳은 서울이라고 생각해요.
인스타그램에 조금씩 보여준 집 풍경을 유추해 보면 배두나의 취향이 드러나 보여요. 가장 애정하는 공간은
집은 구석구석 다 신경 써서 꾸몄어요. 내 몸이 오랜 시간 머물고 나를 대표하는 공간을 만족스럽게 가꾸는 것이 나를 소중하게 대하는 데 아주 중요한 일이 됐거든요. 예를 들어 옷은 지금처럼 잘못 세탁해서 줄어든 셔츠를 입어도 돼요. 왜냐하면 이 옷을 입은 나는 다른 사람이 보는 거지, 내가 보는 게 아니니까요. 다만 내 눈에 보이는 건 아름다워야 해요. 집에 못생긴 건 두지 않겠다는 거죠(웃음). 다리 마사지기가 정말 필요한 적 있었는데 결국 디자인 때문에 꾹 참은 적도 있어요. 친구들은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머물면 기분 좋아지는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메시 소재를 더한 크롭트 재킷과 와이드 팬츠, 블랙 벨트, 모노그램 링, 체인 링은 모두 Louis Vuitton.
‘배우는 배우는 직업’이라는 말은 배두나가 직업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을 통해 뭔가를 얻을 수 있겠다는 사실은 당신에게 중요하게 작용하나요
일석이조라는 개념에서는 물론입니다. 운동이든 기술이든 명확한 것을 배워야 하는 역할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캐릭터의 옷을 입기 수월하기 때문이에요. 캐릭터가 살아온 과거를 상상하기가 조금 쉬워지거든요. 특징 없는 평범한 사람을 연기하는 게 가장 힘들어요.
지금까지 평범해서 가장 연기하기 어려웠던 역할이 있다면
아마도 〈킹덤〉의 서비 같아요. 사극에서 보기 드문 의녀 역할인데 그렇다고 의술이 전면에 드러나는 장면이 많지 않고 등장과 동시에 사건이 터지니까요. 과거 설명이 부족한 주변부 인물을 극에서 맡는 것이 오랜만이기도 했고요. 지금은 서사가 많이 쌓였죠.
벨티드 화이트 미니드레스, 에피 소재의 블레이드 클러치백, 볼드한 실버 체인 네크리스, 버클 모티프 링, 체인 링, 플랫폼 펌프스는 모두 Louis Vuitton.
한번 그 사람에게 들어갔다 나오면 시즌제는 생각보다 편해요. 집에 돌아온 듯한 감회도 있고요. 〈비밀의 숲〉도 시즌 1에서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즌 2가 시작했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 한여진이 뭘 했을지 상상하고 돌아갈 수 있었죠.
길게 자란 머리가 화제가 됐지만 시즌 1에서 입었던 의상을 2에서 입기도 했어요
원래 사람은 같은 옷을 10년 넘게 입기도 하니까 여진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시즌 1의 한강에서 핸드폰을 찾는 장면에서 입었던 회색 루이 비통 코트를 꼭 다시 입고 싶어서 파리 본사에 직접 연락하기도 했죠. 그새 루이 비통 아카이브에 옷이 들어가는 바람에 정말 조심스럽게 입고 반납했어요. 시즌 2 의 막바지, 새로 옮긴 부서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여진이 울며 옛 동료에게 전화하는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볼륨 슬리브의 프린트 톱과 카고 팬츠, 볼드한 체인 네크리스, 지퍼 디테일 브레이슬렛, 버클 모티프 링, 체인 링은 모두 Louis Vuitton.
감독의 역할을 아주 존중한다는 것을 자주 쓰는 ‘연기를 납품한다’는 표현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스스로 ‘납품받는’ 입장이 될 생각은 없을까요
좋긴 하겠네요(웃음). 배우를 하면서 영화를 잘 만드는 천재도 있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해 원하는 그림을 요구하는 것과, 글로 쓰여진 스토리를 체화해서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처럼 연기하는 건 제게는 너무 다른 일로느껴져요. 어떤 면에서는 게으른 것일 수도 있어요. 저는 감독이 OK라고 하면 무조건 OK거든요. ‘내 손을 떠났어. 당신이 책임져’ 같은 마음인 거죠. 내 연기가 좋았다면 그 또한 그걸 끌어내고 알아봐준 감독 덕이고요. 제가 봐도 저는 대중적인 연기자가 아니에요. 잘하는 것도 있지만 잘 안 되는 것도 분명 있어요. 그 안 되는 부분을 되게 하려고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거고요. 저만의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메시 소재를 더한 블랙 재킷과 레더 팬츠, 플랫폼 힐, 버클 모티프 링은 모두 Louis Vuitton.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선택받아야 가능하다지만 배두나는 넓고 다양한 폭으로 선택받으며 자신의 길을 걸어왔죠. 누군가의 뮤즈가 되는, 매력적인 대상으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좋은 기분입니다(웃음). 누군가에게 영감이 되고 창작에 도움이 된다는 건 정말 커다란 기쁨이죠. 많은 분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냐고 물어요. 열의를 갖고, 열심히 관철해서 손에 넣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민망하기도 해요. 제가 특정 분야의 어느 위치에 오를 것을 꿈꾼 건 아니거든요. 타고난 성향이나 감각은 막 자랑스러워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적어도 저는 그래요.
찾아온 기회를 마주하고 뛰어드는 것도 용기죠. 선택받은 상황에서 맡은 바를 해냈기 때문에 지금의 배두나가 있는 것 아닐까요
열심히 했어요. 정말 열심히는 했죠. 하지만 그것도 일단 ‘납품’해야 하니까 그에 충실했을 뿐이에요. 오늘은 내가 입은 옷의 매력을 보여줘야 하는 날이니까 그 생각에만 집중했던 것처럼요.
캐멀 컬러 코트와 모노그램 패턴의 랑데부 백, 플랫폼 메리 제인 힐, 골드 체인 네크리스, 버클 모티프 링은 모두 Louis Vuitton.
일하면서 동기부여나 의지가 돼주는 존재가 있다면
생각보다 단순해요. 조카들이에요. 예전부터 윤여정 선생님이 롤 모델이었지만 일하는 보람을 직접적으로 주는 건 조카들이죠. 자식 있는 부모의 심정이 이럴까 싶을 정도로 얘들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딸을 갖고 싶다는 마음을 꾸준히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도희야〉나 〈터널〉에서 비춰진 면도 있지만 모성애가 강조되는 역에 언젠가 본격적으로 도전하고 싶은지
저는 스물두 살 때도 드라마 〈위풍당당 그녀〉에서 미혼모 역할을 맡았어요. 배우로서 제대로 이 역할을 해볼 때가 됐다는 생각도 하고요. 그러나 엄마가 되고 싶다는 개인적인 꿈은 접은 상태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갖고 싶은 꿈을 다 이룰 수 있겠냐, 그 꿈을 못 이룬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레더 크롭트 재킷과 스트라이프 패턴의 톱, 브레이슬렛은 모두 Louis Vuitton.
대중 예술인으로서 당연히 신경 쓰는 사이입니다. 저 엄청 신경 쓰는데, 그렇게 안 보이나요(웃음). 저 또한 관객으로서 보기 편안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좋아하지, 관객을 배제한 영화는 좋아하지 않아요. 아카데미 회원이라 시상식 투표 참여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영화를 보고 있는 요즘, 영화의 재미에 새롭게 빠져들고 있어요.
슬로건 장식의 메시 슬리브리스 톱과 타이다이 와이드 팬츠, 볼드한 체인 네크리스, 브레이슬렛, 버클 모티프 링, 체인 링은 모두 Louis Vuitton.
스스로를 너무 잘 알아서 가끔 자신이 지겹게 느껴진다고도 했어요. 그럼에도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자신의 모습이 있다면
마음을 계속 열어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내가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 그래도 안 하는 건 또 바보 같다고, 스스로를 열고 몰입하는 작업을 스무 살 때부터 반복해 온 것. 그렇게 순수하게 생각하는 면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사랑스럽게 느껴져요. 전반적으로 저는 참 괜찮은 사람이에요. 일할 때는 조금 까다롭지만요. 그건 사실이에요.
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와 컷아웃 레더 미니드레스, 메리 제인 플랫폼 힐, 볼드한 체인 네크리스, 버클 모티프 링은 모두 Louis Vuit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