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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덕질을 권유하는 이유 #ELLE 보이스

지극히 구체적인 식물의 세계

BYELLE2021.02.03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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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구체적인 식물의 세계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질문 하나. “혹시 이름이 무슨 뜻이에요?” “풀 초(草)에 잎 엽(葉)이에요”라고 대답하면 상대방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정말로 그 뜻이었냐며 놀라곤 한다. 원래는 풀잎이 될 뻔했다가 할머니가 됐을 때의 무게감을 위해 ‘초엽’으로 결정된 내 이름은 비록 삶이나 운명과는 무관하지만 부모님의 취향에 대해서는 한 가지를 확실히 말해 준다. 두 분은 식물을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것. 아빠는 직업 음악가이지만 원예학과를 졸업했다. 어쩐지 어릴 때 식물원이나 산, 들로 가면 나무와 풀의 이름을 모두 꿰고 있더라니. 한편 엄마는 이론보다 실전에 강한 타입으로, 우리 집 거실과 베란다는 화분으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다. 거실을 오갈 때마다 사람 키만 한 여인초 잎에 뺨을 맞기 일쑤지만, 엄마와 같이 살고 싶으면 감수해야 한다.
 
그런 두 분 아래 풀잎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나는 식물에 정말이지 놀랄 만큼 관심이 없었다. 나무나 풀, 꽃의 이름을 구분하기는커녕 꽃다발을 받으면 “이게 장미야, 튤립이야?” 하고 묻는 수준이었다. 어차피 다 비슷하게 생겼는데 이름을 아는 게 무슨 소용인가.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식물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단편도 아닌 한 권 분량의 장편으로.
 
갑자기 식물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그런 건 아니고 지극히 도구적인 이유였다. 떠올린 스토리에 ‘매우 느리지만 끈질기게 퍼져나가서 지구를 지배하는’ 생명체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미생물과 바이러스, 곰팡이, 버섯을 물망에 올려보았고, 심지어 벌레도 진지하게 고려해 봤지만 구상 과정에서 여러 이유로 탈락했다. 생각할수록 식물, 오직 식물만이 내 소설을 구원해 줄 생명체였다. 문제는 내가 식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거였다. 어릴 때 과학 시간에도 외떡잎이니 쌍떡잎 식물이니, 식물의 기관이나 구조가 어떻게 생겼느니 하는 파트를 가장 지루해했다. 나는 일단 온라인 백과사전에서 ‘식물’의 설명과 연관 항목을 샅샅이 찾아 읽었고, 서점에서 식물에 관한 책을 열 권쯤 주문했다. 그중에는 정가 5만 원에 달하는 거대한 풀 컬러 식물대백과사전도 있었다. 내가 오랜 세월 가장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식물의 세계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내 일상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단지 설정상의 가상 식물을 구체화하고, 소설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얻겠다는 생각이었다. SF니까 엄밀한 설정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그래도 식물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으면 분명 쓰다 막히는 부분이 생길 테니까. 그런 방어적인 태도로 식물의 세계를 탐색하기 시작한 나는 식물학자들이 식물의 놀라움에 대해 설파하기 위해 쓴 책을 여러 권 읽고 ‘식물 고수’들의 블로그를 읽어 내려가면서 그들이 가진 식물에 대한 진심에 조금씩 영향을 받았다. 점차 진짜 같은 가상 식물을 고안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사진을 찍으면 식물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PictureThis’라는 앱을 거금 2만5천 원(?)에 구독해 길거리에 풀이 보일 때마다 사진을 찍어댔다. 식물의 과(科)별로 정리한 식물도감을 읽으며 가상 식물을 분류하기에 제일 적합한 ‘속(屬)’을 찾아내고, 〈정원사를 위한 라틴어 수업〉을 읽으며 학명을 붙였다. 작은 반려식물을 작업실에 들였고, 강연이나 행사로 다른 지역에 갈 때마다 그 지역의 수목원과 식물원, 온실 등을 방문하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SF를 쓰면서는 정말 흔치 않은 ‘현장조사’의 기회를, 반쯤은 현장조사를 핑계로 그저 즐겼던 것 같다.
 
그렇게 점점 알게 된 건 예전에는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을 대충 뭉뚱그려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거리의 풀꽃과 나무를 일종의 덩어리로 보고 있었다. 초록색, 빨간색, 갈색, 흰색 같은. 나에게 자연 풍경은 그저 붓으로 슥 그린 물감 덩어리처럼 나무의 군집, 들풀의 군집과도 같았다. 하지만 일단 그 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식물이 모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뿐 아니라 같은 종의 식물도 개체별로 아주 다르다는 사실이 비로소 ‘감각’되기 시작했다. 아이비도 다 같은 아이비가 아니고, 야자나무도 다 같은 야자나무가 아닌 것이다. 식물의 놀라운 고유성과 개별성이란. 비록 잎 모양과 줄기만 보고도 종을 척척 짚어내고 변이 여부까지 알아내는 사람들의 식별력에는 발끝만큼도 못 미치지만, 적어도 그 개별적인 존재들을 하나하나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은 마음만은 이해하게 된 것 같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책을 쓰는 식물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다들 조금씩 화가 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놀라운 식물의 세계에 관심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 지극히 동물 중심적이자 개체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우리의 관심을 호소한다. 과학 분야에서 식물 연구의 가치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많은 예술 작품에서도 식물은 단지 정적이고 수동적인 무생물로 묘사되는 데다가, 식물에 대한 대중적 인식도 동물과는 달리 지루한 존재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식물의 세계에 막 발을 디딘 나는 그런 구절에 고개를 끄덕이고 같이 분개하며 읽었다. 그동안 나는 식물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었던가. 이렇게 신기한 세계가 존재하는데도 인지하기 전까지 그 세계는 나에게 마치 그저 거리에 놓인 정물처럼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나 분야에 대해 ‘뭉뚱그리던’ 무신경한 말을 들으며 조금 속상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잘 모르는 세계의 일부를 대충 넘겨짚고, 그 안의 고유한 개별적 존재들을 구분하지 않는 습성은 어쩌면 많은 정보를 한정된 시간에 처리해야 하는 인간의 뇌가 가진 한계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배우고 성장하는 존재이고, 그 추상성 속에서 구체적인 개별자들을 발견해 나갈 능력이 있는 존재다.
 
어쩌면 나는 평생을 배우고 익혀도 이 세계가 가진 구체적인 개별성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 무수한 구체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살아가는 동안 그것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즐거움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책장의 식물도감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세계를 향한 나의 무지를 인정하고, 계속해서 배워가겠다고. 초록색의 흐릿한 풍경이 어느 날 구체적인 풀의 이름으로 시야에 포착되던 순간처럼 추상적 풍경이 개체들의 개별성으로 전환돼 다가오는 순간을 만날 때, 그 구체성을 통해 나의 세계 또한  확장될지도 모른다.
 
writer_김초엽  93년생 소설가. 포항공과대학교 생화학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나아갈 수 없다면〉, 첫 장편 〈지구 끝의 온실〉을 펴냈다. 따뜻하고 보편적인 서사의 SF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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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이마루
  • 디자인 정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