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 〈이브〉에 출품한 ‘Erase Everything but Love’(2018).

P21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통해 선보인 ‘Spotted’(2019).

정희민, 디지털 시대의 멜랑콜리
」정희민은 3D 모델링 프로그램 스케치업으로 렌더링한 디지털 이미지를 캔버스 위에 정교하게 옮겨 그린다. 정희민의 작품은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불가피하게 견뎌야 했던 일상에서 촉발됐다. “작업실에서 고립된 시간을 보내며, 내가 세계와 어떻게 접촉하고 관계를 맺는지 궁금해졌어요.”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고개를 든 이 호기심은 기술과 미디어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됐다.
우리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어떻게 적응하거나 존재하고 있을까? 정희민의 작품은 이에 대해 감각적이고 미묘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대다수의 일상을 매개하는 건 디지털 디바이스예요. 덕분에 우리는 혼종적인 경험에 익숙해졌죠. 무엇을 ‘나’로 인지하는가 하는 문제도 함께 복잡해졌고요. 혼종적이고 다층적인 우리 모두의 자아 정체감, 그로부터 파생되는 병리적인 징후, 인지 문제에 섬세하게 다가서고 싶었어요.”
정희민은 최근 전시 〈Psychedelic Nature〉를 준비하며 페미니즘 영역에서 자주 언급되는 도나 헤러웨이를 접했다. 그녀는 “나는 여신이기보다 사이보그가 되겠다”는 헤러웨이의 강력하고 분방한 선언에 바로 매료됐다.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며 채우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던 핵심, 늘 마음에 품었으나 말하기 두려워했던 것, 작업 안에서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던 영역을 문자로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이를 계기로 정희민은 그림으로 돌파하려 했던 억압 기제들을 조금 더 전면적으로 드러내기로 했다. “올해 10월에 예정된 개인전은 ‘꽃’에 관한 전시가 될 예정이에요. 꽃이 상징해 온 다양한 역사적, 여성주의적 맥락을 건드리는 페인팅, 모션 그래픽이 뒤섞인 장면을 상상하고 있어요.” 그녀는 지금도 꽃의 야성과 시각적 기이함을 보다 넓은 범주의 여성주의적 측면에서 살펴보고 탐색하는 전시를 위해 리서치를 진행 중이다.
디지털 이미지가 지닌 물성과 감각을 회화로 표현해 온 한국의 1987년생 화가 정희민. 자신을 둘러싼 물리적 세계와 데이터로 존재하는 세계가 소통에 실패할 때 발생하는 멜랑콜리에서 작업의 동력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