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가족사진이 자리하기 마련인 사무실 책상 한 쪽에 그림 형제의 동화책 〈구두장이와 요정들〉이 놓여 있다.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하고, 기쁘게 만드는 이야기를 좋아해서요.” 저스틴 사이몬스(Justine Simons)는 웃으며 말한다. 요정들이 착한 제화공을 위해 밤새 예쁜 구두를 만들어낸다는 동화 속 이야기처럼 현재 런던시 문화 및 창조산업 부시장 저스틴 사이몬스는 17년 전 런던 시청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꾸준히 기발하고 위트 있는 프로젝트로 런더너들을 놀라게 만들고 있다. 2018년 패션 디자이너 안야 힌드마치의 아이디어를 옮긴 ‘처비 하츠 오버 런던(Chubby Hearts Over London)’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예. 런던의 랜드마크 곳곳에 거대한 하트 모양의 풍선을 떠오르게 만든 것이 바로 그녀다. “도시에 대한 사랑을 담은 힌드마치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어요. 하지만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까진 갈 길이 멀겠다 싶었죠.” 프로젝트 실현을 위해 민간 항공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 이어졌지만 사이몬스는 결국 코번트 가든, 트라팔가 광장, 리츠 호텔 등 런던을 대표하는 28개의 장소에 거대한 하트를 띄우는 데 성공했고, 그 광경이 찍힌 사진은 당시 인스타그램 인기 포스팅에 등극했다.
사이몬스에 의하면 문화는 도시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2017년 서울에서 열린 도시예술프로젝트 ‘커넥티드 시티(Connected City)’에 참여한 그녀는 “빈곤, 테러, 주거 문제가 도시 건강과 직결되는 것이라면 문화와 예술은 도시 영혼과 관련된 일이에요”라며 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밤마다 제각각의 불빛으로 템스 강의 다리를 물들이는 대형 공공예술 프로젝트 ‘리버 일루미네이션(River illumination)’ 역시 사이몬스의 작품. 불빛 공해를 염려하는 반대 집단을 설득하는 것부터 계획을 실현시키기까지 무려 15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장기 프로젝트였다. 사이몬스의 성과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건 아마 2012 런던올림픽 기간에 맞춰 진행한 ‘햇워크(Hatwalk)’ 프로젝트일 것이다. 런던을 대표하는 21개의 동상에 모자를 씌운 그 유명한 사건 말이다. 사이몬스는 17세기부터 이어져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런던의 모자 브랜드 록앤코해터스(Lock & Co. Hatters)와 함께 각각의 동상에 어울릴 맞춤 모자를 제작해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제독 동상에 나폴레옹 모자를, 다른 동상에는 중절모·왕관·군인 철모 등을 씌웠다. “말도 마세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을 설득해야 했다니까요.” 그때를 회상하며 사이몬스가 특유의 사랑스러운 미소로 웃었다. “그렇지만 넬슨 제독 동상에 모자를 씌우기 위해 새 둥지를 제거해야 했다든가 뭔가에 도전할 때 생기는 예상 밖의 일들이 너무 즐거웠어요. 재미있잖아요!”
문화부시장으로서 주로 어떤 일을 하는지 물었을 때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렇게 말했다. “기본적으로 제 역할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어요. 런던을 위해 각종 문화 전략을 세우고, 그 전략을 실행하기에 앞서 시장에게 현실적 조언을 해줄 전문위원회를 꾸리는 일이죠. 그 외의 시간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요.” 그녀를 포함해 총 35명으로 구성된 사이몬스의 부서가 그리는 청사진은 다른 사람이 보기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런던 곳곳에 숨결을 불어넣는 아름다운 예술 프로젝트는 분명 런던 시민 그리고 관광객에게 행복을 선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유서 깊은 트라팔가 광장에 입과 발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장애인 아티스트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의 조각상을 설치하는가 하면 영국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지 100주년이 된 해를 기념해 여성 운동가 밀리센트 포셋(Millicent Fawcett)의 동상을 제작하는 등 그녀의 팀은 다양한 방법으로 위대한 영국인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특히 밀리센트 포셋의 동상은 에이브러햄 링컨, 윈스턴 처칠 같은 남성 정치가의 동상으로 가득하던 런던의회 광장에 세워진 첫 번째 여성 동상이었다.
디자이너 안야 힌드마치와 함께 기획한 ‘처비 하츠 오버 런던’ 프로젝트.
런던 내 역사적인 동상 21개에 모자를 씌운 사이몬스의 ‘햇워크’ 프로젝트.
현재 런던시에서 가장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문화 정책은 이스트뱅크(Eastbank) 프로젝트로, 사이몬스는 그중에서도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그녀의 귀띔에 의하면 런던 동쪽의 스트라트포트 지역을 런던 패션 칼리지, 샌들러스 웰스 극장, V&A 뮤지엄과 미국 스미스소니언 뮤지엄의 첫 번째 해외 분관을 모두 아우르는 거대한 문화 지구로 탄생시킬 계획이란다. 이 외에도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문을 닫을 위기인 시내 곳곳의 펍, 클럽, 스케이트장, 음악 공연장에 대한 관심으로 2017년, 런던 시내 문화 산업 종사자들의 고충 창구인 ‘위기의 문화 사무소(Culture at Risk Office)’를 설립하기도 했다. 최근 복원한 언더크로프트 스케이트파크를 시작으로 그녀는 10억 원이 넘는 후원금을 모아 쇠락해 가는 문화 시설들을 재건해 왔다. 사이몬스는 이때가 자신의 직업에 가장 자부심을 느낀 순간이었다고 고백한다. “오페라 극장이나 갤러리도 소중한 문화유산이지만 문화는 그런 곳에서만 피어나는 게 아니니까요.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실, 그래피티로 도배된 스케이트장, 오래된 펍 모두 우리가 지켜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죠.” 그녀와 처음 만난 날은 런던 시청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던 날로, 시청 안은 무채색 정장에 반듯한 구두를 신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구입한 이국적인 블라우스와 찰랑거리는 초록색 롱스커트를 입은 사이몬스가 눈에 띈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시청에 처음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저에게 좀 더 격식에 맞는 차림으로 출근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하더군요. 물론 그 조언들을 가볍게 무시해 버렸지만요.” 어릴 때부터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그녀가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었어요. 대신 학교 규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충분히 반항적이었고, 취향과 의견을 드러내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죠.” 사이몬스는 지금의 자신을 만든 데는 초등학교 때 아동무용단에 입단한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고백했다. “줄곧 공부만 했다면 반쪽짜리 인간이 되었을 것 같아요. 무용단 생활이 그만큼 좋았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무용단에서 평생 친구인 루스 매켄지(Ruth Mackenzie)도 만났다. “한번 일을 맡으면 무서울 정도로 열정을 불태우는 우리는 서로에게 멘토 같은 존재였어요.” 매켄지는 현재 파리 뒤 샤틀레 극장에서 예술감독으로 일하고 있으며 2012 런던올림픽 기간에는 사이몬스와 함께 런던의 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도 했다. 무용단 졸업 후 다양한 페스티벌과 각종 공연을 기획하며 커리어를 쌓아가던 사이몬스는 마침내 2002년, 문화국장으로 런던 시청에 들어오게 됐다. “맨 처음엔 도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로부터 10년 뒤, 2012 런던올림픽을 기점으로 그녀는 런던시의 주요 프로젝트를 도맡으며 존재감을 키워왔다. 당시 런던 문화부 총무를 맡고 있던 사이몬스에게 주어진 임무는 두 가지. 올림픽을 런던의 문화유산을 홍보할 창구로 활용할 방안과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지속 가능한 문화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해답을 찾기 위해 시내로 나간 사이몬스는 트라팔가 광장에서 햇워크 프로젝트를, 피카딜리 서커스 역에 수천 개의 하얀 깃털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광경을 머릿속에 그렸다. 곧바로 상상 속의 프로젝트에 착수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피카딜리 서커스에서의 이벤트를 위해 웨스트민스터 위원회와 런던 경찰청을 설득해 피카딜리 서커스 역 주변을 봉쇄하는 남다른 추진력을 발휘했다. 피카딜리 서커스가 문을 닫은 건 제2차 세계대전과 유럽 전승기념일 이후 최초의 일이었다.
사이몬스와 만난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에 올랐다. 다리를 건너던 전철이 템스 강 위에 잠시 멈춰 섰을 때, 나를 포함한 탑승자들은 일제히 보랏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블랙프라이어스 브리지를 바라보았다. 확신에 찬 열정을 지닌 한 사람이 10여 년에 걸쳐 완성한 우리 모두를 위한 선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