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주의 물건] #04. 못생긴 스웨터의 반란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일하는 여성, 자신의 즐거움과 욕망을 감추지 않는 여성, 평등과 해방을 갈구하는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들던 빨간 머리의 디자이너. 소니아 리키엘의 푸어 보이 스웨터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 요주의 물건,스웨터,소니아 리키엘,푸어보이스웨터,#soniarykiel

게티이미지   빨간색 폭탄 머리를 한 모델이 자신의 옷을 뜨개질하며 걸어 나온다. 검은색 실 뭉치를 끌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지난 2008년 10월 1일에 열린 소니아 리키엘 2009 S/S 컬렉션. 하우스 탄생 40주년을 기념하는 이 쇼는 한 사람의 일생을 보여주었다. 평생 빨간 머리로 살았던, 파격적이고 유쾌한 것을 좋아하던, 자신이 입고 싶은 현실적인 옷을 만들던 니트의 여왕, 소니아 리키엘이다.       소니아 리키엘은 <엘르>와도 인연이 깊다. 1962년, 임신한 자신의 몸에 편안하게 잘 맞는 옷을 찾지 못해 직접 옷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때 만든 것이 입고 벗기 편하고 부드러운 스웨터였다. 그리고 <엘르> 프랑스판은 그녀의 혁신적인 디자인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대중에게 알렸다. 1963년 12월, 프랑소아즈 아르디가 줄무늬 스웨터를 입고 <엘르> 표지에 등장한 것.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싶지만, 하이 패션을 다루던 매거진에 스웨터가 실리는 것은 당시엔 파격적인 일이었다. 너무 타이트해서 마치 줄어든 것처럼 보이는 이 스웨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몸에 꼭 맞는 가느다란 소매, 높은 암홀, 블랙과 팝 컬러를 섞은 독특한 컬러 조합. 스웨터는 못생기고 투박하고 섹시하지 않다는 통념을 완전히 깨버리는 아이템이었다. 이후 ‘푸어 보이 스웨터’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아이템은 남성적이면서 동시에 여성적이고, 강하고 호전적이면서 동시에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실용적이라는 점이 당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커버를 본 오드리 헵번이 소니아 리키엘의 스웨터를 14벌이나 구매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Twitter@soniarykiel Twitter@soniarykiel Twitter@soniarykiel ✓ (위부터) 1963년, 1969년, 1979년에 발행된 <엘르> 프랑스판   그리고 4년 뒤인 1968년, 소니아 리키엘의 첫 컬렉션을 세상에 선보였다. “모든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라고 외치는 젊은이들의 행진이 이어지던, 이른바 68혁명이 일어난 시기였다. 평등과 해방을 갈구하던 여성들을 위한 리키엘의 의상은 강인하면서 섹시했고 입는 사람에 따라 변화하는 형태였다. 리키엘은 1983년 프랑스 문화부로부터 예술문화 훈장을 받았고, 2009년에는 정부로부터 받는 최고 훈장인 레지옹 드뇌르 훈장을 받았다. 프랑수아 올랑드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평가처럼. 그녀는 ‘스타일 뿐 아니라 태도, 생활 방식, 존재 방식은 발명했으며 여성에게 자유로운 움직임을 제공’한 사람이었다.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2016년, 니트의 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장녀 나탈리가 경영과 관리, 디렉팅을 맡았지만, 브랜드는 곧 위기를 맞게 되었다. 독립 기업으로서 가족 경영을 이어가던 시절의 어려움, 서로 다른 비전을 품은 전문 경영진들의 갈등과 잘못된 결정, 근시안적인 선택들, 무리한 조직 개편 등 모든 나쁜 이유와 나쁜 시기가 겹쳤다. 결국 지난 3월, 런웨이 쇼를 취소하고 쇼룸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줄리 드 리브랑은 하우스를 떠났다. 그리고 4월, 소니아 리키엘 하우스는 법정 관리에 들어가 7월에 파산 신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게티이미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여성들을 위한 세련된 줄무늬들은, 베레를 쓴 빨간 머리 소녀들은. 깡봉 거리의 샤넬이나 몽테뉴 에비뉴의 디올, 포부르 생또노레의 에르메스처럼 브랜드의 정체성 그 자체였던 생 제르망의 소니아 리키엘 스토어는 어떻게 될까. 그녀가 생전에 살았던 곳 근처, 선데이마켓이 열리는 작은 길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Allée Sonia Rykiel)가 있다. 패션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최초의 거리다. 그녀가 자주 가던 카페 드 플로르(Cafeé de Flore)에는 마담 리키엘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녀가 즐겨 먹던 빵과 마요를 뺀 ‘클럽 리키엘 샌드위치’를 판매한다. 여전히 파리 곳곳에 존재하는 붉은 머리의 아이콘. 시, 소설, 동화 등 십여 권의 책을 쓴 작가였고, 논패션(non-fashion)이라는 새로운 패션 철학을 설파한 사람이었으며,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아이콘이었던 그녀의 이름이 100주년과 150주년을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 트렌드를 뛰어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지닌 물건 뒤에 숨은 흥미로운 이야기, 김자혜 작가의 ‘요주의 물건’은 매주 수요일에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