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식의 변천사 | 엘르코리아 (ELLE KOREA)

기내식이 등장한 지 100년이 지났다. 차가운 샌드위치부터 스타 셰프의 협업까지 입맛 다시게 하는 기내식의 역사. | 여행,기내식,비행기,식사,푸드

  인류 최초의 기내식은 1919년 10월 11일 영국과 유럽 대륙 간 바다 어디쯤에서 탄생했다. 꼭 100년 전의 일이다. 영국의 핸들리페이지 트랜스포트는 승객들에게 샌드위치와 과일, 초콜릿이 든 도시락을 3실링에 판매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였다. 민간인이 단순히 여행을 목적으로 비행기를 타는 행위는 아무나 상상할 수 없는 시절이었고, 실제로 당시 항공 여행을 즐긴 이들은 최상류층이었다. 물론 항공 요금도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그런데 고작 차가운 샌드위치를, 그것도 유료로 제공했다고 하니 다소 의아하다. 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비행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전쟁 때 영국 공군이 활용하던 장거리 폭격기를 민간용으로 개조한 여객기로 지금의 비행기와는 천지 차이다. 승객석 8석이 전부인 좁은 기내에서 무언가를 사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사치스러웠다. 샌드위치에 미지근한 커피나 홍차를 내주는 등 좁은 보폭으로 발전하던 기내식은 1927년 프랑스 항공사 에르위니옹이 풀코스 기내식을 선보이며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에르위니옹은 따로 마련한 다이닝 공간에서 오르되브르, 로브스터 샐러드, 차가운 닭고기와 햄, 니스풍의 샐러드, 아이스크림, 치즈와 과일을 차례로 내놨다. 식탁에는 백색의 리넨 식탁보와 은식기가 놓여 있었고, 음료로는 샴페인·와인·위스키·커피 등이 제공됐다. 지금 우리가 지상에서 받는다고 해도 충분히 호화롭다고 여길 만한 식사였다. 그런데 자세히 뜯어보면 다소 이상한 구석이 있다. 모두 차가운 음식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따뜻한 기내식은 1928년 루프트한자항공이 기내에 최초로 ‘갤리(Galley)’라 부르는 주방을 갖추며 세상에 등장했다. 1930년 유나이티드항공의 전신인 아메리칸보잉에어 트랜스포트가 간호사 출신의 여승무원을 고용한 일 또한 현대의 기내 서비스를 갖추는 데 중요한 근간이 됐다. 그전까지 승무원은 남성들이었다. 특히 초기에는 남성 중에서도 체구가 작은 10대 소년들을 고용했다. 안전이나 서비스보다 비행기 하중이 더 중요하던 시절이었다. 몇몇 항공사는 소년들이 살찌면 벌금을 물리기도 했다. 여성은 남성보다 체구가 작지만, 사회 진출이 어려웠고 무엇보다 비행은 위험한 일로 분류됐다. 그도 그럴 것이 흑백사진 속 비행기 좌석들은 바람 불면 날아갈 듯 가벼워 보인다. 또 항공사들이 고급 호텔 서비스를 추구한 만큼 제복 입은 남성을 선호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아메리칸보잉에어 트랜스포트가 여승무원을 채용한 이유는 그들이 간호사였기 때문이다. 당시 비행 환경은 열악했다. 기압이 현저히 낮았고, 기체는 크게 흔들렸다. 간호사 출신의 여승무원들은 기내 서비스를 제공하며 환자를 돌봤다. 여담이지만 그들이 자신의 역할을 전문적으로 잘 수행했기에 오늘날까지 수많은 여성 비행 전문가를 배출할 수 있었던 셈이다.   1950년에 들어 항공 기술이 발달하며 기체가 한층 커지고 비행시간도 대폭 줄었다. 그전에는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12일 이상 걸렸다면 누가 믿겠는가. 항공사들은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요금에 좌석을 팔 수 있을지 고민했고, 기내식을 고급화하는 일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46년 기내에 오븐이 처음으로 장착되면서 기내식은 냉동 식품으로 발전했다. 그전까지는 따뜻한 기내식을 제공하기 위해 지상에서 조리한 음식을 보온 상자에 담아 보관했다. 밥을 생각해 보라. 몇 시간씩 전기밥솥에서 보온 상태로 묵힌 밥보다 차라리 먹기 직전에 해동한 밥이 낫지 않겠는가. 덩달아 음식의 질이 개선되고 기내식 메뉴도 다양해졌다. 아, 이때만 하더라도 퍼스트, 비즈니스, 이코노미 등의 좌석 구분이 없었다. 항공 여행은 여전히 선택받은 소수만이 즐길 수 있었으니. 당시 사진을 보면 모든 승객이 지금의 퍼스트 클래스 좌석보다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또 다이닝 공간을 따로 두어 식사 시간이 되면 레스토랑을 찾듯 승객들은 기내에서 이동했다. 특히 2층짜리 비행기일 경우 2층은 휴식 공간, 1층은 레스토랑 겸 라운지로 활용했다. 당시 다이닝 공간은 실제로 지상의 고급 레스토랑과 다를 바 없었다. 하얀 식탁보에 꽃과 과일이 탐스럽게 놓여 있고, 은식기와 크리스털 잔에는 트러플, 캐비아, 로브스터, 푸아그라 등 최고급 식재료로 완성한 요리와 돔 페리뇽 등의 고급 샴페인이 채워졌다. 물론 기압과 습도가 낮아 지상에서만큼 맛을 입체적으로 느끼진 못했으나 사람들은 3만 피트 상공에서 초호화 만찬을 즐긴다는 사실에 도취됐다.   처음 좌석 등급제가 등장한 건 1955년의 일이다. 트랜스월드항공은 더 많은 사람을 싣기 위해 일부 좌석을 좁게 만들고, 이를 ‘세컨드 클래스’라고 명명했다. 항공사들은 세컨드 클래스로 다다익선의 미덕을 추구하는 한편, 퍼스트 클래스로 부가가치를 높이려 했다. 문제는 세컨드 클래스가 등장하며 기존 승객은 여분의 공간을 잃었고 식사도 제자리에서 해야 했다. 항공사들은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등급별 기내식 격차를 키우는 데 집중했다. 흡사 뷔페 진열대를 연상시키는 큼지막한 카트에 전 세계의 산해진미를 푸짐하고 화려하게 차려낸 후 이동하며 승객이 원하는 요리를 즉석에서 접시에 담아줬다. 이때 조리복을 풀 착장한 셰프가 등장하는 곳도 있었다. 또 식사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스테이크는 레어, 미디엄, 웰던 등 굽기 정도를 고를 수 있도록 했다. 한편 세컨드 클래스에서는 기내식을 쟁반에 담아 카트에 싣고 다니는 현대의 서비스가 이때 완성됐다.   대한항공 기내식 인기 메뉴, 비빔밥. 마리메꼬 식기에 담겨 나오는 핀 에어 비즈니스 클래스 기내식. 터키 항공 플라잉 셰프 서비스. 우리나라에서는 1969년 대한항공이 국제 노선을 운항하며 기내식을 처음 선보였다. 해외 항공사처럼 서양식을 제공하던 대한항공은 한식 기내식을 개발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컸다. 그 결과 우리가 환영해 마지않는 기내식인 비빔밥이 탄생했다. 사실 비빔밥은 퍼스트와 비즈니스 클래스 승객에게만 제공하는 특별식이었다. 즉석 밥이 개발되기 전이었던 만큼 승무원들은 전기보온밥솥을 들고 기내에 탑승해야 했고, 이런 방식으로는 일반석 승객까지 아우르지 못했다. 그러던 중 CJ가 1996년 즉석 밥을 출시하자 이를 적극 활용하여 이듬해 비빔밥을 일반석 메뉴로 확장했다. 비빔밥 기내식은 1998년 국제기내식협회(ITCA)로부터 머큐리상 대상을 수여받았다. ‘기내식의 오스카상’이라고 불리던 머큐리상 대상을 받은 건 아시아계 항공사로는 최초였다. 같은 해 마이클 잭슨이 한국행 비행기에서 비빔밥을 먹고 그 맛에 매료돼 국내 체류 기간 내내 비빔밥만 먹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실제로 비빔밥 기내식은 전 세계에 한식을 알리는 데 공이 컸다. 특히 2000년대 중반 드라마 <대장금>을 애청한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비빔밥 기내식을 맛보기 위해 자국 항공기 대신 대한항공을 선택하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또 2006년에는 아시아나항공과 대한항공이 각각 비빔국수와 영양쌈밥으로 나란히 머큐리상 금상을 수상하며 겹경사를 맞기도 했다.   최근 항공사마다 스타 셰프 모시기에 바쁘다. 셰프와 가장 활발히 협업하는 항공사는 단연 에어프랑스다. 미식의 성지답게 알랭 뒤카스, 조엘 로부숑, 기 마르탱, 미셸 로스 등 자국 출신의 천재 셰프들을 초빙하여 메뉴를 꾸준히 개발한다. 콴타스항공은 닐 페리를, 델타항공은 미셸 번스타인을, 일본항공은 세이지 야마모토를, 핀에어는 토미 밀리마키 등을 섭외했다. 터키항공은 스타 셰프를 모시는 차원을 넘어 아예 모든 국제선에 셰프를 태우기에 이르렀다. 조리학을 전공하고 레스토랑에서 다년간 경력을 쌓은 셰프가 기내에 탑승해 마지막 순간까지 기내식에 전문가의 손길을 닿도록 한 이 제도를 터키항공은 ‘플라잉 셰프’라고 부른다. 한편 저가 항공사들이 프랜차이즈 기업과 협업하여 개발한 기내식도 흥미롭다. 이스타항공은 BBQ와 손잡고 하늘 위에서 치킨을 먹는 진귀한 경험을 선사하는가 하면, 에어부산은 부산의 명물인 어묵 요리를, 에어서울은 서울 대표 음식인 불고기를 판매한다. 항공 여행의 경험이 늘며 사람들은 더 이상 기내식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따박따박 나오는 밥을 누가 마다하랴. 심지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3만 피트 상공에서 말이다. 기내식 한 그릇에는 여전히 그 여행을 꿈결처럼 기억하게 해줄 마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