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아의 목소리 | 엘르코리아 (ELLE KOREA)

그녀의 입술이 열리고 혀가 움직인다. 저 아래에서 끌어올린 힘이 목구멍에 도달하고 매끄러운 중저음이 비로소 소리로 화하는 순간, 유정아는 완성된다. 그녀의 처음이자 끝. 세상 어디에도 없을 그녀만의 악기. 그 소리를 들었다. ::유정아,고뇌의 원근법,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엘라서울,엘르,엣진,elle.co.kr:: | ::유정아,고뇌의 원근법,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엘라서울,엘르

그녀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한 발, 또 한 발. 딱 그녀의 발 사이즈 만큼 새까만 정적이 더해지고 다시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선다.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지 않은 적당한 속도. 조심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경솔하지도 않게 뱉어내는 말들. 그녀의 뒷통수를, 깊게 파인 등을, 구두의 궤적을 쫓던 시선들이 그녀의 음성에 매달리기 시작한다.모노드라마 은 거의 전적으로 유정아라는 한 여자에게 의지한다. 원작자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만약 이 작품이 연극으로 올려진다면 그 형태는 낭독이어야 한다고 못 박았더랬다. 연출자로서 아티스트 양혜규는 각색 중에도 원작자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라갔다. 하지만 낭독이라는 행위가 증폭되면서 그 힘을 발휘하게 되는 건 결정적으로 유정아라는 섬세하지만 선 굵은 진공관을 거치면서다. 무대에 허락된 건 약간의 영상과 한두 가지 물건이 다였다. 한 시간 반 동안 무대를 채우는 단 한 사람, 적어도 이틀 간 작품 속 ‘당신’과 ‘그 여자’가 머무는 몸. 객석을 압도하고 무대를 채우는 그 여자의 존재감이란. 어쨌든 걷고 옷을 입고 단어를 또렷하게 발음하는 그것은 분명히 연기는 아니었다. 뒤라스와 양혜규, 사랑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당신’과 ‘그 여자’를 한데 담은 유정아는 연기 없이 한 편의 연극을, 배우 없이 한 곳의 무대를 온전히 장악해버리는 건가. “제가 훌륭한 배우처럼 잘 해내지는 못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물론 체화된 건 있었겠죠. 양혜규 씨, 공동 연출가 이해제 씨와 대본 리딩을 하면서 익혀온 것들이요. 양혜규 씨가 원한 건 그 무대에 뒤라스가 서는 것도, 양혜규가 서는 것도 아니었어요. 뒤라스와 양혜규를 유정아로서 받아들인 사람이어야 의미가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 무대에 있었던 건 한 달 남짓 대본 연습을 거친, 그냥 그 상태로의 유정아였던 셈이에요.” 뒤라스 혹은 양혜규와 이전부터 이어져온 깊은 인연이 있었다거나 한 건 아니다. 학창 시절 사무엘 베게트, 이오네스코 같은 작가들의 이야기를 해주던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뒤라스를 처음 들었고 학교 앞에 헌책을 싣고 오던 리어카에서 를 사서 읽었다. 아련한 호기심은 생겼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감동이나 애정이랄 건 아니었다. 양혜규는 오며가며 얼굴만 알았다. 비엔날레에 나간 적이 있고 뒤라스에 천착하며 늘 치열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배우 경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녀를 양혜규가 자신의 뮤즈로 초대했을 때 긍정적인 대답이 나왔던 건 친분이 아닌 신뢰 때문이었다. 뒤라스와 양혜규라는 인간에 대한 신뢰. 그리고 남산드라마센터에서 그녀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와 힘 있는 낭독은 관객들을 빨아들였다. 여자 치고는 살짝 낮은 톤, 음절마다 흘러나오는 신중함과 지성, 아나운서 출신다운 분명한 발음. 1989년 KBS 아나운서로 입사한 그녀의 얼굴, 목소리는 브라운관과 전파를 타고 대중에게 점점 더 친숙해졌다. 유난히 많은 클래식 음악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했고(‘열린음악회’, ‘한낮의 음악실’, ‘저녁의 클래식’, ‘FM 가정음악’ 등) 그러면서 생긴 클래식에 대한 애정으로 두 권의 에세이(과 )를 펴내기도 했다. 프리랜서로 ‘명사초대석’을 진행하고 있는 요즘 그녀는 22년차 베테랑 방송인이자 서울대학교에서 수년 간 말하기 강의를 맡아온 인기 강사다. 그녀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여럿 있는데도 그녀의 이미지는 여지껏 ‘아나운서’ 4글자에 갇힌 채 평면적으로만 인식된다. 사람들은 그녀의 성격과 취향마저 적당히 넘겨짚는다. 새침할 테고 고급스러울 것이며, 게다가 클래식이니 연극이니 하는 걸 보니 고상하거나 고상한 척 하거나. 그런데 정작 스스로를 이야기하는 그녀 자신의 표현은 ‘묵은 사람’이었다. ‘묵은’이라는 단어에는 묘하게 긍정적인 울림이 있었다. “트렌드나 유행을 쫓아가는 게 쑥스러워요. 예를 들면 스키니 진이나 배기 팬츠 같은 것들. 그런 걸 내가 사고 입는다는 거 자체가 어색해요. 싫어한다기보다는, 아주 최신의 것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 배기 팬츠는 정말 편해 보이긴 하던데, 하하.” 클래식 음악에 매력을 느끼는 건 그래서다. 몇 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들을 행복하는 음악이니까. 천재적인 연주자가 대저택에서 우아하게 떠올려낸 악상이든 생계에 쪼들리던 가난한 작곡가가 악착 같이 쓴 곡이든 ‘정수’가 담겨 있다면 그 곡은 다음 세대에 클래식이 된다. 변하지 않는 가치에 대한 존경. 그것을 존경하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다. 결혼과 이혼을 겪었고 달갑지 않은 유난스런 관심도 받아봤다. “제가 입사할 때는 아나운서가 된다는 게 20대에 이름과 얼굴을 알린다는 정도의 의미였죠. 제 사생활이 노출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해봤어요. 그래서 기자들과도 많이 싸웠어요. 학교 앞에 찾아온 기자더러 ‘당신이 이런 일을 겪었다면 학교까지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는 게 좋을 거 같으냐’며 돌려보낸 적도 있어요.” 약간의 미소가 섞여들어가지만 여전히 안정적인 소리. 문득 그녀의 목소리가 베이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듬과 멜로디 사이의 절묘한 균형, 뒤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포지션, 드럼을 보좌하고 기타와 보컬을 받쳐주는 역할. 클래식을 잘 알지 못하니 비유도 록 밴드에 하게 되는 모양인데, 베이스의 가장 윗줄, E선쯤에서 나는 소리라고 말하면 될까. 나는 여전히 그녀를 잘 알지 못한다. 자신의 작품이 고민 없이 쉽게 읽히는 걸 거부했던 뒤라스처럼 시간과 의미가 중첩된 유정아라는 텍스트도 독해하기에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한번의 낭독과 한번의 인터뷰로 뭔가 알게 된 게 있다면, 그녀의 무게중심은 자신의 목소리처럼 아랫쪽에 견고하게 놓여 있어서 웬만해서는 그 목소리가 떨리지 않을 거라는 것.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물론, .공연 중에 민망했던 순간이 있었다면?미리 녹음해둔 내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이 정도면 나도 무대에 종종 서도 되겠다 싶었던 순간은?거의 가득 찬 객석 전체가 무대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느꼈을 때.암전 때 무대 위에서 무슨 생각을 했나?음. 간간히 딴 생각을 했다. 하하. 이 연극이 아무래도 보통 연극보다는 좀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내가 아는 후배나 어르신이나 그런 분들이 저기 있을 텐데, 그 사람들은 보면서 무슨 생각 하고 있을까. 첫 날은 내가 살짝 긴장해서 손이 떨렸는데 그런 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리고는 관객이 이걸 쫙 빨아들이고 있구나, 그런 걸 그냥 있는 그대로 느꼈다.평생 잊지 못할 대사는?“죽음이 살, 아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죽음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살아진다는 거다. 그리고 “당신은 결코 시작되지 않아요.” 재미있었던 건 “값을 치른 밤이 몇 밤이나 남았나요? 세 밤.”이틀 간의 공연이 끝나고 한 일은?월요일에는 인터뷰를 녹음하러 갔고 밤에 12시간을 잤다. 오늘은 다시 운동을 시작하고 인터뷰하러 온 거다.공연의 후유증은?허전하다. 대본 연습이 그립다. 텍스트를 사이에 놓고 연출가, 공동 연출가, 나 이렇게 셋이서 각자가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이야기했다. 그게 즐거웠다. 그리고 등짝이 아프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무대 뒷편에서 찬 바람이 나왔는데, 등이 파인 무대 의상을 입고 있어서 그런가. 내 인생에서 완전 새로운 일이었으니 알게 모르게 영향이 있을 거다.다시 또 공연할 생각이 있나?이번처럼 신뢰하는 사람과 일할 수 있다면.당신이 생각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만 알고 그 시대의 가치만 생각하는 것. 그 외에는 궁금해하지 않는 것. 그래서 철저한 생활인이 되어버리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에 나오는 ‘리틀 피플’ 같은 거다.평소 공연을 자주 보나?좋아하는 편이다, 낯선 시간을 보내는 걸.두 번째 책 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클래식은 먼 얘기가 아니예요. 절대로 날 버리지 않을, 가장 친한 친구로 삼을 수 있어요.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딱 한 곡?바흐의 일명 중 ‘양들은 편안히 풀을 뜯고’. 원곡도 좋고 피아노곡 등으로의 편곡도 아주 좋다.내가 생각할 때 10월에 듣기 좋은 클래식 곡은?가을엔 어떤 곡이라도 다 좋다.클래식 말고 좋아하는 음악 장르는?재즈. 전혀 전문적이지 못하지만.트로트도 좋아하나?별로 좋아하게 되지 않더라.노래방 애창곡은?왁스의 ‘여정’, 이은미의 ‘어떤 그리움’.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있나?피아노. 예전에 클래식 기타도 배웠는데 지금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서울에서 클래식을 듣기 좋은 장소는?자신이 지금 있는 데서 가장 가까운,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곳.글쓰기를 좋아하나?글 쓸 때가 제일 행복하다. 글에 대한 경외가 늘 있었다. 내가 과연 쓸 자격이 있는가 라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많이 했는데, 이렇게까지 글쓰는 게 즐거운데 누구도 ‘너 자격 없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에세이를 쓸 때 쓰는 글과 관련된 음악을 듣나?그럴 때 있고 안 그럴 때 있다.갖고 있는 클래식 음반은 몇 장?많지만 세보지는 않았다.서울대에서 말하기 강의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은?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배경음악으로 틀어놓고 자기 소개 스피치를 했던 학생.학점을 가차없이 주는 편인가, 때로 봐주는 경우도 있나?학점은 격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강의 성격상 발표 점수로 학점을 매기는데, 이게 리포트나 시험으로 학점을 주는 것과는 완전 다르다. 발표에 대한 평가가 안 좋으면 말하기에 대한 자신감이 오히려 떨어진다. 이건 강의 목표에 완전히 역행하는 거다.말하기 선생님으로서 내가 보기에 엘라서울 에디터의 말하기 점수는 10점 만점에 몇 점? ….스스로 평소에 남과 잘 소통하는 편이라고 생각하나?잘 소통하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다.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바쁘다는 말. 자신의 바쁨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게 한심해 보인다.일의 성격상 인터뷰를 할 일도, 인터뷰를 당할 일도 많을 거 같다. 체질상 인터뷰어? 인터뷰이? 인터뷰어.이전에 한 칼럼에서 말에도 여러 가지 매력이 있다고 한 적이 있다. 유창미, 투박미, 비장미, 성실미 등. 그 중 내가 갖지 못한 건?진정한 유창미.20년 간의 방송 경력 중 최악의 방송 사고는?뉴스하다 웃은 것. 시말서 썼다.방송할 때 징크스가 있다면?기분이 약간 가라앉는다.지금까지 했던 방송 중 가장 애착이 가는 방송은?.방송 생활, 혹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내가 남자였으면 좀 더 유리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나?뉴스 진행이 끝나고 대화할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생각 나지도 않는다.기센 사람, 어려운 사람, 높은 사람을 상대하는 나만의 비법은?다 사람이다. 특별히 어려운 사람도 없고 유난히 나쁜 사람도 없다. 사람 위에 사람 없다.인터뷰어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는?마종기 시인과의 인터뷰. 그 분이 두어 번 눈물을 흘리셨다. 진정 눈과 눈을 마주했던 인터뷰였다.인터뷰어로서 가장 많이 해온 질문은?누구랑 가장 친하게 지내는가.인터뷰이로서 가장 많이 받아온 질문은?인생에서 언제가 절정이었다고 생각하는가.에 개인적으로 한번쯤 꼭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신영복 선생님.갖고 있는 물건 중 가장 많은 건?스카프와 목도리.옷을 사는 장소는?10년 넘도록 옷을 사러 특별히 어디에 가본 적이 없다. 지금 입은 것도 그렇고 옷 하는 친구가 있어서 그냥 그대로 받아와서 입는다. 옷 같은 것도 예전에는 좋아했는데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다. 어차피 이거 참 좋다 싶은 건 가격이 말이 안 되니까. 모든 욕망을 딱 놨다. 하하.가장 최근에 구입한 물건은?봉평에 이효석 문학제 사회를 보러 갔을 때 장터에서 산 케냐산 팔찌.술을 좋아한다면 주종은?와인과 독주.아나운서 출신이라 혼자서도 메이크업을 잘 할 것 같다. 풀메이크업에 걸리는 시간은?15분.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네는?효자동과 북촌.어떤 운동을 얼마나 자주 하나?주 2-3회 헬스.책을 많이 읽는 것 같다. 어떤 종류의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가?새로 나온 소설, 인문학 서적.권하고 싶은 책은?어떻게 한 권을 추천하나. 아, 서경식 씨의 책들. 과 .자기계발서나 잠언집도 좋아하나?안 좋아한다.평소에 남을 잘 챙겨주는 편인가?아니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옆에 있는 사람이 부족한 거 없게 챙겨주고 기분 맞춰주고 그러지를 않는다. 난 만나면 만나는 거고 이 사람이 내 마음을 알면 아는 거고 그렇다.내가 가장 예민해질 때?대단히 기본적인 것을 지키지 않고서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내가 가장 너그러워질 때?그 사람이 잘못을 알고 뉘우칠 때.방송과 클래식 에세이, 이제는 연극까지.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1년에 한 편 정도씩 연극을 하고 싶어졌다.휴대폰 액정 화면의 문구나 사진은?없다.무언가에 대한 제의나 부탁이 들어왔을 때 흔쾌히 수락하는 편? 오래 생각하는 편?제의나 부탁하는 문장을 읽거나 전화 상의 목소리를 듣거나 하면서 감으로 결정하는 편이다.뭔가를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하나?그런 편이다.살면서 이건 내가 참 잘한다 싶은 일 또는 내가 맡은 역할 중에서 가장 즐거운 역할은?잘하는 건 무대에서 어떤 역할이 주어졌을 때 관객을 흔들리지 않게 끌고 가는 것. 두 아들의 엄마라는 건 굉장히 뿌듯한 일이다.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것도 즐겁고. 방송은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은 거 같다.내가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혹은 나이가 드는구나 싶을 때는 언제인가?신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괄호 속 나이가 대부분 나보다 아래라는 걸 깨닫게 될 때.*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10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