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믈리에들에게 와인은 겉멋이 아닌 생활이자 직업이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올해로 9회를 맞는 한국소믈리에대회, 결선 심사위원 제의를 받았다. 1, 2차 예선을 거쳐 올라온 최종 8인의 후보 중 우열을 가리는 그 치열한 현장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한 새삼스런 사실. 어려운 와인 라벨을 외우느라 스트레스를 받는 대신 가까이 있는 소믈리에라는 전문가들과 상담하면 된다는 것. 그들에게 와인은 거품이나 겉멋이 아닌 생활이자 직업이었다.::황지미,소믈리에,대회,엘르,엣진,elle.co.kr:: | ::황지미,소믈리에,대회,엘르,엣진

진지하게 디캔팅을 하는 황지미 소믈리에의 정교한 손길.THE WINE FEVER무대 위, 첫 번째 테이블. 위세 등등하게 놓여 있는 글라스 와인 한 잔. 인터콘티넨탈 그랜드 볼룸을 가득 채운 관람객들과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와인 잔을 집어든 첫 번째 지원자를 향해 일제히 쏠렸다. 잔을 기울여 컬러를 비춰보고 향기와 맛을 음미하는 진지한 표정. 드디어 고요한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연 참가번호 1번 비나포의 이승훈 소믈리에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 “이 와인은…” 첫 번째 미션은 블라인드 테이스팅. 와인을 시음한 후 품종, 지역, 빈티지와 잠재력 등에 대해 설명하고, 아울러 함께 매치할 메뉴까지 추천하라는 주문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단 4분. 게다가 조건이 하나 더 있었으니, 영어나 프랑스어로 설명하라는 것. 정답은 브루고뉴 지역의 2005년 빈티지의 메종 샹송 주브레 샹베르탱이었다. 엉뚱한 답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부르고뉴 지역을 맞춘 건 지원자의 절반인 네 명, 피노 누아 품종을 맞춘 건 단 세 명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딱 한 명, 브루고뉴 피노 누아는 물론 주브레 샹베르탱이라는 아펠라시옹을 정확히 맞추고 게다가 2005년 빈티지까지 맞춘 지원자가 나왔다. 8명의 참가자 중 일곱 번째 지원자로 침착하게 프랑스어로 설명한 황지미 소믈리에였다. 2단계 테스트는 이미 와인을 주문한 한국인 커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메뉴를 추천하는 것. 주어진 시간은 역시 4분이지만 총 200점 만점 가운데 60점이라는 가장 높은 점수가 걸려 있었다. 손님이 주문한 와인은 2004년 빈티지의 리슬링 그랑 크뤼 비벨스베르그라는 화이트 와인. 흔히 생선 요리에 어울리는 걸로 유명한 와인이다. 하지만 최고의 소믈리에를 선발하는 테스트가 그렇게 간단할 리 없었다. 잠시 시음을 마치고 메뉴를 추천하려는 지원자들에게 남자 손님의 전격 선언이 이어졌다. “제 여자친구는 생선을 못 먹는데요.” 바로 이 대목부터 점수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생선 요리를 못 먹는다는 손님의 말에 대부분 닭고기를 추천했지만 구체적인 이유나 리슬링과 어떻게 맛이 어우러지는지에 대해 설명한 이는 많지 않았다. 세 번째 미션은 앞의 두 단계에 비하면 언뜻 몹시 단순해 보였다. 하프 버틀 크레망 달자스를 일곱 잔에 골고루 서빙하라는 거였다. 제한 시간 3분.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었으니, 우선 테이블에 놓인 빈 잔이 일곱 개가 아니라 여덟 개라는 거였다. 게다가 그 중 한 잔은 립스틱 얼룩 자국이 묻어 있는 더러운 잔이었다. 의외로 단순해 보이는 함정에 긴장한 지원자들의 상당수가 실수를 했다. 결국 최종 우승을 한 황지미 소믈리에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시간 제한에 대한 압박이 너무 컸어요. 더러운 잔은 없는지 당연히 살펴봤어야 하는데 쫓기는 마음에 생각도 못했어요.” 얼룩이 있는 불필요한 여덟 번째 잔을 바로 골라낸 지원자는 여덟 명 가운데 단 두 명이었다. 일곱 잔에 고루 따랐다고 해도 추가로 다시 양을 맞추면 가차없이 감점이었다. 바쁜 현장에서라면 단체 손님이 왔을 때 두세 번씩 분량에 맞춰 서빙할 여유는 없다는 거였다. 결선의 마지막 4단계 미션은 그룹 손님을 접대하며 디캔팅 능력을 선보이는 것. 내가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단계기도 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외국 손님들을 초대한 비즈니스 테이블의 호스티스였다. 지원자들은 셀러에서 와인을 꺼내자마자 내게 다가와 라벨을 보여주었다. 설정대로 와인에 침전물이 있는 것 같으니 디캔팅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바로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몸짓을 보니 그들의 치열한 열기가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디캔팅을 마치고 테이블의 손님들에게 서빙을 완수하기까지 주어진 시간은 다시 7분. 그때, 테이블의 외국인 손님 하나가 침전물이 와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돌발 질문을 던졌다. 능숙하게 작업을 계속하면서 동시에 영어로 답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대답을 하느라 잠시 디캔팅을 멈추는 사람 등 지원자 별로 대응은 제 각각이었다. 결국 시간 조절에 실패해 서빙을 마치지도 못한 채 제한 시간 7분을 모두 써버린 이도 있었다. 그렇게 일인당 총 18분씩 여덟 명의 지원자들은 공개된 무대에서 모든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약 석 달에 걸친 대장정 중 마지막 시험을 모두 마쳤다. 지원자들의 부담에 비할 바는 아니었겠지만 초보 심사위원 노릇도 생각보다 꽤 체력과 지구력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았다. 총 네 단계로 이뤄진 최종 결선에서 가장 배점이 높은 단계는 와인에 어울리는 메뉴를 추천하는 2단계였다. 블라인드 테이스팅 후 외국어로 와인을 묘사해야 하는 1단계나 그룹 손님을 응대하며 디캔팅을 해야 하는 4단계보다 20점이나 배점이 높았다. 행사를 주최한 소펙사의 정석영 소장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사실 손님을 대하면서 와인 품종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뭐는 어떻고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진 않잖아요. 손님은 단지 식사를 하면서 가장 맛있게 와인을 마시고 싶을 뿐이니까요. 그러려면 어떤 와인을 미리 오픈해야 하는지, 또 어떤 와인을 어떤 디캔터로 디캔팅하여 몇 도에 서빙해야 하는지, 여러 병의 와인을 마실 경우 어떤 순서로 마시고 어떤 음식과 매칭해야 하는지, 마시는 손님 입장에서 충고해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소믈리에일 테니까요. 실제 업장에서 손님들이 가장 즐겁게 와인을 마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전문가를 선발하자는 것이 애초부터 소믈리에 대회의 취지에요.” 국제소믈리에대회 심사위원이기도 한 심사위원장 장 파스칼 포베르가 강조한 대목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건 소믈리에가 어떤 메뉴를 추천했을 때 그걸 마셔보고 싶고, 먹어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 신뢰감이야말로 소믈리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죠.” 올해로 9회째를 맞는 한국소믈리에대회는 2001년 처음 시작됐다. 와인 업계 종사자들 사이 소문이 나고 수상자들이 점차 권위를 인정받으면서 조금씩 증가 추세를 보이던 참가자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난 건 2005년 무렵. 와인이 가장 트렌디한 아이콘으로 떠오른 시점이기도 했고 업계에서의 권위와 관심도에 비례해 그 때부터 시험의 난이도도 지원자들의 수준도 대회 자체의 무게감도 달라졌다. 2단계였던 시험은 3단계로 세분화됐고, 2008년부터는 2차 예선을 통과하려면 외국어 실력까지 갖춰야 했다. 주요한 시험의 코스 중 하나인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영어 혹은 프랑스어로 와인을 설명해야 한다는 조건이 새로 추가된 것이다. 이왕이면 국내 최고 대표로서 국제소믈리에대회에도 참가할 수 있도록 글로벌한 경쟁력을 고려한 대목이었다. 재도전은 기본, 삼수, 사수생들도 늘어갔다. 심지어 수상권에 오른 이들조차 그랬다. 이번 대회에서 아깝게 2등을 차지한 리츠 칼튼의 은대환 소믈리에는 2001년 2회 때부터 지금껏 해마다 도전해온 의지의 주인공. 역시 5위 안에 입상한 타워그안 청담점의 채태근 소믈리에나 보나세라의 김창모 소믈리에도 이미 여러 번 최종 결선에 오르며 도전해온 끈기파들이다. 이론과 실전, 양쪽에 있어 상당한 난이도를 요구하는 시험의 특성상 지원자들은 일찌감치 따로 스터디 모임을 만들기도 하는 등 장기적인 플랜을 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코 만만한 시험이 아니란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현장에선 명성을 떨치고 있는 지원자들마저 7전8기로 도전을 멈추지 않는 건 한국 최고의 소믈리에라는 타이틀이 그만큼 매력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널리 인정받는 와인 제조국인 프랑스 농수산부가 직접 주최하고 소펙사(프랑스농식품진흥공사)가 주관해 프랑스 농수산부가 발급하는 인정서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공신력을 인정받는데다 특히 1등 수상자의 경우 집중적인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업계는 물론 대중적으로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소믈리에라는 전문가로서 보다 넓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확실한 발판이 되는 것이다. 최종 결선에서 5위 안에 드는 수상자들에게 제공되는 프랑스 와이너리의 연수 프로그램 또한 ‘황제 투어’라는 별명이 붙으면서 대회를 준비하는 소믈리에들에게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고 있다는 후문. JUST TASTE IT와인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막걸리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미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다. “아, 그래요?”라는 반문 뒤에 이어지는 반응 중 가장 난감한 부류는 와인 리스트를 들이대며 그렇다면 이제 어디 한 번 얼마나 아는지 증명해 보라는 신호를 보내는 이들이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선생님 모드로 세상의 모든 와인 산지와 와인 품종에 대한 특강에 나서는 이들도 있다.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대다수에게 와인은 마니아와 그렇지 않은 이들로 경계가 나뉘는 술일 때가 많다. 이에 반해 요즘 한창 인기인 막걸리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조금 다르다. 막걸리를 즐겨 마신다는 말에 갑자기 눈빛이 예리해지면서 포천과 횡성과 부산 막걸리의 ‘아로마’와 ‘포텐셜’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상대를 테스트하는 무례를 강요하진 않는다. 유독 와인만, 여전히 유리 상자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냉정히 돌이켜보면 사실 우리나라의 와인 문화라는 것이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여전히 우린 와인 과도기에 머무르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한때 트렌드의 정점에 있던 와인과 샴페인 바람은 게다가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함께 어느덧 한 풀 꺾인 상태. 하지만 분명한 건 근사한 저녁 만찬의 기분 좋은 시작으로, 밤새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수다의 친구로 이제 와인은 전혀 낯선 선택이 아니라는 거다. 이렇게 또 한 고비가 지나면 다시 와인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취향의 일부가 될 거다. 한쪽에서는 최고의 소믈리에가 되기 위해 수천 병의 와인을 시음해보고 따로 기록하고 공부하며 치열한 준비를 하고 있지만 소믈리에라는 직업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도 불과 몇 년 전이긴 하다. 여전히 업무의 경계 또한 애매해 레스토랑 오너의 눈높이나 인식에 따라 처우나 업무에 있어 현저한 차이가 나기도 하고 대부분은 서버의 역할까지 함께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대체 소믈리에가 왜 필요하냐고 반문하는 오너의 생각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사위원 자격으로 대회의 결선 과정을 지켜보며 새삼 발견한 건 소믈리에라는 직업이 얼마나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지 와인을 즐겨 마시는 나조차 잊고 있었다는 자각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일등을 차지한 황지미 소믈리에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원래 소믈리에라는 직업은 와인은 물론 물이나 커피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료를 관리하는 직업이거든요. 유럽에서 건너온 문화다 보니 그 중 메인인 와인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강조될 뿐이죠. 그래서 저는 사케 소믈리에나 막걸리 소믈리에 등이 늘어나는 것도 환영이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프랑스에서 일할 때는 고작 인턴이었지만 소믈리에라는 역할 그대로 손님들과 커뮤니케이션하거나 와인 리스트를 관리하는 일이 대부분이었어요. 우선 손님들이 소믈리에를 전적으로 신뢰한달까요. 어떤 음식과 어떤 와인을 마시는 게 좋을지 식사 과정의 일부처럼 당연하게 상의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소믈리에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느낌이에요. 마니아들은 원래 알고 있던 와인을 선호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무조건 와인은 비싸고 어렵다고 생각하며 경계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와인이 어려운 건 당연한 거예요. 하지만 그래서 전문가들이 있는 거잖아요. 소믈리에에게 편하게 물어보세요. 그리고 와인은 그냥 즐기드시면 돼요.” ▒ How to win the test 제9회 소믈리에 대회에서 1, 2차 예선을 1위로 통과하고 마지막 3차 결선에서 일등을 차지한 노보텔 엠베서더 더 비스트로 소속 황지미 소믈리에에게 몇 가지 팁을 전수받았다. 경력 보르도의 와인 전문 학교인 카파 포르마시옹(Cafa Formations)에서 1년 코스를 밟으며 양조학, 와이너리, 테이스팅, 와인 경영 등 전반적인 교육을 받은 후 다시 1년 동안 현지 레스토랑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다. 프랑스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현지 요리에 대해 익히고 아카시아 꽃, 백합, 바질은 물론 고양이 오줌 냄새까지 하나하나 직접 맡아보고 기억하는 연습한 게 큰 도움이 됐다. 블라인드 테이스팅 하루아침에 미각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테이스팅은 무조건 연습하는 수밖에. 맛도 중요하지만 향이 정말 중요하다. 기본적인 포도 품종 등은 향으로 읽어낼 수 있는데 평소 다양한 성분을 직접 맡아보고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 실전 대비 정말로 집중적으로 심도 깊게 공부해야 한다. 와인 빈티지라든가 산지, 품종에서 최근의 와인 트렌드나 문화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특히 와인의 종류별로 음식 매치, 서빙 온도, 서빙 방법 등은 바로 매치할 수 있어야 한다. 혼자 준비하는 것보다 스터디 그룹과 함께하는 편이 좋다.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9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