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도시에서 보낸 일 | 엘르코리아 (ELLE KOREA)

하루쯤, 아침엔 뮌헨 거리를 산책한 후 점심은 브뤼셀에서 먹고 오후 내 파리에서 쇼핑에 푹 빠져 보내는 어떤 날. 오직 쇼핑과 휴식을 테마로 세 도시에서 보낸 일주일.::뮌헨,브뤼셀,파리,유럽,엘르,엣진,elle.co.kr:: | ::뮌헨,브뤼셀,파리,유럽,엘르

1 뮌헨 마리나 플라츠의 전경. 주변 골목마다 아기자기한 볼거리와 부티크들이 이어져있다. 2 파리에서 가장 고급스런 부티크들이 밀집해있는 생토노레 거리 입구. 3 파리 라발레빌리지의 전경.4 파리 시내에선 거리마다 자주 만나게 되는 풍경. 공원 근처 벤치에 앉아 한가로이 책을 읽는 사람들. border line파리, 뮌헨, 브뤼셀. 일주일 남짓한 시간에 유럽의 중심을 가로 지르는 아름다운 세 도시를 오가는 스케줄. 언뜻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세 도시의 공통점은 하이엔드 브랜드부터 이지 캐주얼, 리빙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백화점이나 로드 숍이 부럽지 않을 막강한 라인업의 제품을 일년 내내 최대 70%까지 할인된 가격에 판매하는 프리미엄 아울렛, 시크 아울렛이 있는 도시라는 거였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의 테마는 분명했다. 교외에서 한 번에 즐기는 편안하고 한적한 쇼핑과 충분한 휴식. 작정하고 쇼핑을 즐기는 대신 다른 일정에 있어선 무리하지 않을 것. 쇼핑으로 소모한 에너지는 잘 먹고 잘 쉬면서 보충할 것. 하지만 떠나기 전 막상 스케줄을 점검하자니 역시 한 번에 세 도시는 너무 무리가 아닐까, 라는 걱정이 스멀스멀 끼어들었다. 파리는 익숙했지만 뮌헨과 브뤼셀은 처음이었다. 초행인 도시가 둘이나 있으니 당초 마음과 달리 조금 더 관광객 놀이를 하고 싶은 욕심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 먹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여행을 망치는 건 늘 과욕이었다. 일상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고 잠시라도 다른 나를 즐기겠다며 비싼 돈을 들여 비행기 티켓을 구매해놓고 하나라도 더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발을 종종거리다가 더 피곤하기만 했던 기억들. 여행 가이드 책에 나오는 도시의 명소들을 모두 방문해 깃발이라도 하나씩 꽂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본전 생각을 하는 순간 여행 또한 회사 상사들 앞에서 긴장한 채 발표하는 프레젠테이션이나 마찬가지로 피곤한 숙제가 되고 만다는 걸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야 몇 년 전 겨우 깨달았다. 나의 결론은 단순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여행에 있어서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 이번 일주일로 또 하나 배운 게 있다면 한 도시, 한 장소를 슬렁슬렁 머무르듯 여행하는 것만큼이나 한 가지 테마로 여러 장소를 비교하며 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거다. 뮌헨 잉골슈타트 빌리지에서 쉬엄쉬엄 쇼핑하며 피곤한 하루를 보낸 후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음날 아침은 모던함의 끝을 달리는 뮌헨 루이스 호텔에서 보기만 해도 건강해질 것 같은 유기농 야채들과 신선한 빵과 커피를 먹고, 이번엔 브뤼셀 마스메켈렌 빌리지에서 서유럽 특유의 개성 있는 브랜드들을 잔뜩 감상하고, 다시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로 건너가 샹젤리제 거리의 라 뒤레에서 마카롱과 애프터눈 티를 마시는 것. 그렇게 적당한 휴식을 취한 다시 파리 라발레 빌리지에서 미친 듯 쇼핑에 몰두하는 것. 어쩌면 어줍잖은 허세나 사치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유럽에서라면 전혀 불가능하지도, 무리일 것도 없다. 도시가 바뀌고 나라가 바뀌지만 그래 봤자 두세 시간 남짓, 교통 체증이 가장 극악할 때를 기준으로 하면 서울의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에 도달할 정도의 시간 혹은 조금 길게 누군가와 저녁 식사를 하거나 게으름을 피울 시간이면 어느덧 몸은 또 하나의 국경을 넘어 다른 도시,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것이다. 어쩌면 국경이란 건 애초부터 그리 대단한 무엇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좁혀지지 않는 것은 언제나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우리의 마음과 마음 사이의 거리인 것처럼. shopping and the city본격적인 쇼핑의 시간. 첫 코스는 파리 시내 중심가에서 40분 남짓 떨어진 라발레 빌리지였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무작정 찾았다가 체력이 모자라 고생했던 지난번 쇼핑을 교훈 삼아 이번엔 선글라스와 가벼운 쇼퍼백에 발이 편한 운동화까지 나름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뉴욕이나 라스베이거스에 우리나라 여주에도 오픈한 첼시 아울렛이 있다면 유럽을 대표하는 프리미엄 아울렛은 단연 시크 아울렛이다. 런던, 파리, 마드리드, 바로셀로나, 프랑크푸르트, 브뤼셀, 밀란, 뮌헨, 더블린 등 유럽의 주요 거점 도시에 사이 좋게 이웃한 시크 아울렛은 자유를 중시하는 유럽인들의 성향을 반영하듯 브랜드 라인업에서 매장 특성까지 도시별 개성이 도드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각각의 매장도 ‘빌리지’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사실 1백여 개의 부티크들이 모여 있으니 작은 마을이라 불러도 손색없긴 하다. 그 중에서도 런던의 비스터 빌리지와 파리의 라발레 빌리지는 가장 막강한 브랜드 라인업을 자랑하는 대표 빌리지들. 살바토레 페라가모, 겐조, 폴 스미스, 버버리, 크리스챤 라크르와, 아르마니, 발리 등 100여 개 부티크가 펼쳐져 있는 라발레 빌리지를 헤매다 보면 차라리 샘소나이트 매장에 들러 트렁크부터 하나 사서 시작하고픈 충동에 시달릴 수도 있다(실제로 2년 전 처음 라발레를 찾았을 때 내가 저지른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사항 하나. ‘아울렛’이라는 단어의 어감만으로 막연히 싼 것만을 찾아 헤맨다면 발품은 발품대로 팔고 별다른 소득 없이 빈손으로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최대 60~70%까지 할인율이 높은 건 사실이지만 ‘프리미엄’이라는 별명만큼 워낙 고가에서 시작하는 제품들이 많아 막상 마음에 드는 걸 콕 집고 나면 생각보다 싸지 않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또 하나 기억해야 할 프리미엄 아울렛 쇼핑 원칙은 되도록 오래 입을 자신만의 기본 아이템 위주로, 클래식한 디자인을 고르라는 것이다. 라발레 빌리지에서 가장 눈에 띄게 붐비는 매장이 버버리와 랄프 로렌인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평소 쇼핑 리스트에 기본 스타일의 트렌치코트를 올려둔 사람이라면 다양한 트렌치코트가 착하게 줄지어 있는 버버리 매장에 들어선 순간 누구라도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백화점 매장의 ‘정상가’를 아는 이라면 번뇌는 더욱 깊어진다. 가격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시즌 제품인지까지 친절하게 명기돼 있으나 트렌치코트의 한결같은 활용도를 생각하면 딱히 가장 최근 시즌을 찾아 눈에 불을 켜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 하지만 안틱 바틱, 꼼뜨와 데 꼬또니에, 자딕 앤 볼테르, 제라드 다렐, 아네스 베 등 파리지앵 스타일의 특유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프랑스 브랜드들이야 말로 라발레 빌리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쇼핑 포인트다. 라발레 빌리지 투어만으로 체력이 동나기 십상이지만 파리 시내까지 편리하게 연결되는 RER 입구로 향하다 보면 H&M이나 자라 등의 로드 숍들이, 그것도 파리 시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널찍한 매장에 한적하게 자리 잡고 있어 떠나려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발목을 잡는다. 파리 여행 코스에 라발레 빌리지를 추가했다면 이래저래 적어도 한 나절 이상은 비워두는 편이 좋다. 파리 시내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위치를 활용해 가까이에 있는 디즈니랜드나 퐁텐블로 등을 이어 하루 코스로 잡는 것도 하나의 아이디어다. 샴페인으로 유명한 랭스 지방도 가까워서 와이너리 투어도 고려해볼 만하다. 특히 디즈니 호텔에서 라발레 빌리지까지는 셔틀버스를 운영해 중동의 부호들이 애용한다는 소문이다. 라발레 빌리지가 우리에게 지극히 익숙한 브랜드들의 규모로 유혹한다면 뮌헨 잉골슈타트 빌리지나 브뤼셀 마스메켈렌 빌리지에선 처음 보는 브랜드의 문을 두드리는 걸 두려워하지 말 것. 세 번째로 기억해야 할 아울렛 쇼핑의 원칙이다. 평소 편애하던 인터내셔널 단골 브랜드를 그냥 지나치기란 참새 방앗간보다 힘들다는 거 안다. 하지만 반짝반짝 의외의 보석 같은 아이템을 발견하는 쏠쏠한 재미는 발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난감한 로컬 브랜드인 경우가 훨씬 많다. 브뤼셀의 마스메켈렌 빌리지에는 프링글 오브 스코틀랜드, 베르사체, 휴고 보스 등 100여개의 브랜드가 있지만 스카파(SCAPA), 개스트라(Gaastra), 지스타, 레나 랑에(Rena Lange) 등은 적절한 눈요기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들러야 할 브랜드. 진작부터 패션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앤트워프 출신의 디자이너들을 떠올린다면 놀랄 일도 아니지만 독특한 서유럽 감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마스메켈렌 빌리지가 있는 곳은 엄밀히 말하면 브뤼셀이 아니라 벨기에와 독일, 네덜란드 국경과 인접한 지역이어서 그만큼 세 나라의 문화가 골고루 섞여있는 것이 특징이다. 파리의 라발레나 런던의 비스터처럼 규모로 압도하진 않지만 훨씬 독특한 느낌을 풍긴다. 작고 아기자기한 숍들이 인기인 로컬의 전통으로 다른 도시들보다 전체적으로 뷰티크의 규모가 작은 편인데 휴고 보스와 토미 힐피거만이 거대 매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아, 마스메켈렌 빌리지를 찾는다면 꼭 빼먹지 말고 들러야 할 곳이 한 군데 더 있으니, 바로 이탤리언 레스토랑 개스트로노미아 셀리니(Gastronomia Cellini)라는 곳이다. 피자도 파스타도 무작정 사람 숫자대로 메뉴를 시켰다간 머릿속에서 생각하던 크기의 딱 두 배만한 접시를 보고 입이 떡 벌어질 거다. 그런데 이게 또 맛이 제법 괜찮은 거다. 분주하게 포크를 놀리다 보면 어느새 그 엄청난 양을 모두 해치웠다는 걸 깨닫고 흠칫하게 되지만 어쨌거나 쇼핑의 기본은 체력이니까 다시 쇼핑하며 에너지를 쓰면 된다. 맥주와 와인, 와플과 함께 벨기에의 명물인 초콜릿도 쇼핑 리스트에서 제외하기엔 섭섭하다. 마스메켈란 빌리지 주변은 스타급 레스토랑들을 근처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미식가들에겐 소문난 곳이기도 하다. 뮌헨 시내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잉골슈타트 빌리지 역시 마스메켈렌 빌리지처럼 개성있는 작은 부티크들이 많다. 필리파 케이(Filippa K), 스트레네스, 아이그너, 휴고 보스 등은 그 중에서도 빼놓지 말고 들러야 할 매장들. 독일 특유의 절제된 디자인에 실용적이면서 베이식한 아이템들이 많아 생각보다 알뜰한 쇼핑을 즐길 수 있다. 평소 자동차에 관심이 많다면 잉골슈타트 빌리지 근방에 있는 아우디 뮤지엄도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운 코스. 물론, 유럽에서도 소문난 뮌헨의 맥주맛을 종류별로 감상하는 즐거움도 빼놓지 말 것. 맥주 맛 하나로 뮌헨을 떠나기가 싫어질지도 모른다. 올해로 10주년을 맞는 시크 아울렛을 이용한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소비량은 지난해와 비교했을 때 무려 85%나 증가했다. 공항에서 환급받는 세금을 기준으로 한 수치라는 걸 고려하면 실제로 현명한 아울렛 쇼핑을 즐기는 인구가 꽤 드라마틱하게 늘었다는 이야기다. 유럽을 여행객들 가운데 다녀온 사람이 추천하고 아는 이들만 찾아가던 것이 이제는 쇼핑 마니아라면 반드시 빼먹지 말아야 할 코스가 돼버린 것이다. 이제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엔 근방에 위치한 시크아울렛 위치부터 확인해볼 것. 5 마침 벨기에 출신의 패션 모델 안로랑 너츠의 전시가 한창이던 하셀트 모드 뮤지엄. 6 동화속 마을처럼 아기자기한 뮌헨 잉골슈타트 빌리지의 전경.fashion and life도시를 알려면 직접 걸으며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길에서 마주치는 돌멩이에, 오래된 담벼락에 묻는 수밖에 없다. 한 번에 전부 알려는 욕심과 다 안다는 착각을 버리고 천천히 뒷굽이 닳아 해진 운동화 몇 개를 버리고 다시 살 정도의 시간은 지나야 도시는 그제서야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게으른 내가 여행지에서 빼먹지 않는 습관 아닌 습관이 있다. 아침을 가볍게 챙겨 먹은 후 짧게는 10분에서 때론 한 시간씩, 호텔 로비에서 구한 지도를 한 장을 든 채 슬렁슬렁 거니는 아침 산책. 낯선 도시가 깨어나는 아침을 보는 건 역시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학교와 회사를 향해 바삐 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틈에 끼여 여행자이면서 그렇게 나는 잠시 도시의 일부가 되는 상상을 해본다. 일정의 거의 대부분을 쇼핑에 투자하고 난 후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약간의 허전함은 갤러리와뮤지엄을 찾아 마음의 양식으로 메꿨다. 브뤼셀 마스메켈렌 빌리지에서 3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모드 뮤지엄 하셀트(mode museum hasselt)에서는 벨기에 출신의 패션 모델 안로르 너츠(Hannelore Knuts)에 관한 전시가 한창이었다. 관람객들로 붐비지 않는 작은 뮤지엄에서 찬찬히 한 시기를 풍미했던 최고의 패션 모델의 변천사를 보고 아기자기한 숍들로 가득한 주변의 다운타운을 구경하며 보내는 한나절은 꽤 평화로운 경험이었다. 여행의 마침표는 파리에서 전부터 벼르던 이브 생 로랑 회고전을 보는 걸로 대신했다. 입구부터 출구까지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던 아름다운 전시. 기꺼이 거장이라 불러도 좋을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의 궤적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여자의 삶을 바꿨는지 생생히 목도하며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들을 바라봤다. 지금 입어도 손색이 없을 허리를 질끈 동여맨 트렌치코트와 스커트의 압박에서 여자를 자유롭게 해방시키며 이제는 전설이 된 스모킹 룩만큼 인상적이었던 건 너무 진지한 눈빛으로 찬찬히 전시를 둘러보던 희끗한 은발의 파리지앵 할머니들이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건 한 디자이너의 역사라거나 패션의 모멘트가 아니라 이브 생 로랑의 시거릿 팬츠를 입고 퐁 데자르를 거닐던, 그들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60년대의 어느 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가올 어느 날 파리, 브뤼셀, 뮌헨을 오가며 보냈던 이 한 주를 내가 오래 도록 기억하게 될 것처럼.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8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