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만 여전히 낯선 남자가 있다. 어수룩한 말투로 ‘오 마이 갓’을 외치던 귀여운 브루터스. 충직한 심복으로 천지개혁을 꿈꾸던 강직한 한섬. 재벌 2세 망나니로 주색(酒色)만 밝히는 천박한 장호. 모두 한 남자다. 연극판에서 ‘놀던’ 조진웅이 브라운관으로 ‘놀러’ 왔다.
전종혁(이하 ‘전’): 어딜 봐도 조진웅이란 배우로 꽉 차있다. 한번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함께 온 기자는 우리 막내다. 팬이란다. 김나래(이하 ‘김’): 선배에게 데려와 달라고 졸랐다. 정말 명품 조연이란 생각이 든다. 와, 감사하다.
전: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나? 듣자 하니 조진웅이라는 이름은 가명인데, 아버지 이름이라고! 아버님께 혼나지 않았나? 연극만 쭉 하다가 영화를 하게 되었다. 다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데뷔작으로 알고 있지만. 난 연극판에 더 오래 있었다.
김: 사람들은 조진웅이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왔는지 모른다. 연극을 하다 영화를 하게 됐을 때, 정말 충격을 많이 받았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이게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내 연기에 있어서 또 다른 시작 같은 느낌. 뭔가 새로운 것을 가지고 가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아버지를 굉장히 존경한다. 영화 크레디트에 이름 올라가잖아. 연출부에서 연락이 왔길래 마루에 있던 아버지 이름 쓰겠다고 했다. 아버지한테 이름 좀 빌려 쓰겠다 하니 보증 서는 건 안 된다 그러시더라고. (웃음) 이제 집에서 가져 갈 게 없어서 별 걸 다 가져간다고. 할머니는 아버지 이름을 '딴따라' 하는데 쓴다고 뭐라 그러셨고.
전: 남자들에게 아버지는 무서운 대상일 수 있다. 굉장히 젠틀하다. 위트도 있으시고.
전: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아니셨네. 그렇지 않았다. 엄할 때는 굉장히 엄하셨지만. 난 한대도 안 맞아 봤다.
전: 정말? 그러기 쉽지 않았을 텐데…. 안 때렸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 입장이다. 아버지의 카리스마 앞에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고등학교 때 담배 피우다 걸린 적이 있는데 아버지가 할말 없냐고 하시더라. 그래서 담배 피웠다 그랬지. 뭐 그런 스타일이다. 연극 할 때도 반대하지 않고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 지금까지 훌륭한 선배들은 해온 게 많은데, 그 어려운 과정을 다 뚫고 와야 그런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그 과정 속에서 네가 포기할 것 같으면, 지금 그만 두고 새롭게 시작하는 게 어떠냐고. 나는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다. 부산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정말 혼란스럽더라.
전: 오히려 아버지의 말씀이 더 부담스러웠겠다. 그 말씀은 뭐지? 그랬다. 이제는 조금 알겠다. 작업을 하면서. 이게 뭐다. 이게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안 거지.
김: 왜 연극영화과를 가게 됐나? 참 희한했던 게 연극영화과를 가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어릴 때부터 ‘나는 이쪽 계통이구나’란 생각을 했었지.
김: 막연하게? 글 쓰는 것도 좋아했고 극작에도 관심이 많았다. 내 생각을 글로 쓰기도 했었고. 사촌형이 경희대 국문학과를 다녔는데,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언젠가 그 형이 그러더라. 자기 생각이 있으면 그걸 글로 써내라고. 그 형님은 글로 풀어내는 거고 누구는 그림으로 풀어내는 거라고. 음악도 좋아했다. 고 3때 글을 쓸 지 음악을 할 지 연극을 할 지 고민을 많이 했다. 놀다가 풀렸는데.
전: 무슨 의미지? 방탕하게 살았다는 말? ‘작업’이라는 단어도 몰랐을 때니까. 고민을 한창 할 때 ‘극작’이라는 단어를 만난 거다. 누가 쓴 글을 내가 표현해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지.
전: 연극은 어떻게 시작했나? 부산에는 배우 인프라가 없다. 그래서 내 소스가 너무 좋은 거지. 저건 어디다 걸어 놔도 그림은 나오니까. 나 같은 경우에는 선생님들이 이리 와서 연기해 봐 이러면서 공연 시작하게 됐다.
전: 발성이나 연기 호흡도 전혀 모를 때? 그렇지. 그런 거 하나도 몰랐다. 근데 지금 생각하면 꽤 큰 역할을 많이 맡았다. 배우가 없는 거지. 장군 역할인데 그만한 풍채를 가진 사람이 없는 거다.
김: 와, 큰 장점이다. 내가 장점이 됐던 게. 부산 배우들은 표준말을 안 쓴다. 다 사투리 쓰니까. 그래서 번역극 같은 경우 사투리가 툭툭 나온다. 김윤석 선배와는 부산에서 같이 연극을 했었거든. 형님이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에서 짐 역할을 맡았는데 ‘남부 지방의 융숭한 대접 감사했습니다’란 대사(김윤석 흉내를 내며)를 사투리로 하는 거다.
전, 김: 와, 하하하. (웃음)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연극을 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연극을 하니까, 못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때부터 계속 공연만 하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학교에서 이론으로 배우는 연극론, 서양 연극사 같은 거 다 공연으로 배운 거다.
전: 영화 이야기를 좀 해볼까? 영화에 처음 들어가게 된 계기는 뭔가. 서울시립극단 나오고. 어쨌든 부모님이 다 서울에 계시니까 대학 졸업하면 다시 가려고 했다. 그러다 서울에 적이 없으니까, 서울시립극단에 들어가게 됐고. 근데 거기서 오래 못 버틴 거다. 부산에서는 굉장히 저항적으로 연극을 했었다. 치열하게. (서울 시립에서는) 스스로 나태해지는 걸 느꼈다. 몇 시에 출근하고 퇴근한다는 명칭을 쓰니까.
김: 공무원 같은 느낌이었겠다. 처음에는 좋았다. 돈도 준다고 하니까. 그런데 공연을 안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다. 부산에서는 돈 받고 공연 한 적이 거의 없었거든. 연기의 목적은 무조건 의식이었으니까. 그런데 서울에서는 안 그런 거다. 물론 적응할 수도 있었겠지. 근데 나랑은 스타일이 좀 안 맞았다. 나는 뭔가 하면 땀도 나야 되고 피도 나야 되는데. 뭔가 펄펄 끌고. 때려 부숴야 하고.
전: 맞다. 그렇게 치열한 삶이 아닌 거지. 서울시립극단도 정확한 텍스트가 주어져 있고, 거기에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은 비슷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굉장히 정형화되어 있고 양식화되어 있더라. 스스로 용납이 안 되는 거다. 쉽게 얘기 하자면, 노예로 살다가 양반이 됐는데 양반이 안 맞는 거지. 그래서 나오게 됐다. 짚신이 마음에 편하다.
전: 그래서 영화를 한 건가? 서울에서 역삼동인가를 걷다가 우연히 군대 고참을 만났다. 그 친구가 <말죽거리 잔혹사> 연출부로 일하고 있더라. 뭐하냐 묻길래 ‘놀지’ 그랬더니, 이 친구는 알아 듣는 거다. 아직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그럼 영화 한 번 놀아볼래’ 그러더라. 그 영화가 <말죽거리 잔혹사>다.
전: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 먹게 한 작품이 뭔가? 사실 실질적인 계기는 <말죽거리 잔혹사>가 아니라 <우리 형> 때였다. 오디션을 4차까지 보더라. 마지막에 다섯 명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한다고 했었지. 한 사람 당 30~40분씩 보는 거야. 그때 나는 진인사 필름에 곽경택 감독이 있었기 때문에, 곽경택 감독님이 하는 줄 알았다. 감독님은 언제 보나 했었지.
전: 당시에는 감독이 아직 안 정해졌나 보다. 난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보다 역할을 맡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감독이 누가 될지는 별로 안 중요했다. 근데 오디션을 보는데, 화장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는 거다. 안권태 감독(<우리 형> 감독) 목소리야. 동기거든. 사실 나보다 나이가 5살 많은 형님이지. 아씨. 동긴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당시에 내가 형 이렇게 못 하잖아. 감독이 날 보더니 ‘남은 시간 잘 좀 해줘요’ 이러면서 들어가는 거야. 잠깐만 우리 동기잖아. 열 받는 거야. 진짜 웃긴다 그랬지. 감독 되니까 변하는 구나 싶었다. 예전에 형을 만나서 술 몇 잔 마실 때도 영화감독으로 데뷔 하더라도(안 그런다고). 자기는 그게 모토라고 했었거든.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될 줄 몰랐지.
전: 형이라도. 학교 동기는 친구지 뭐. 오디션 보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전화가 왔더라고. 권태형한테서. 이거 형 전화번호니까 입력해두라고. 오늘 네 연기 너무 좋았고 앞으로 네가 두식이 역할을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된 거야…요?’이러니까, 그냥 형이라고 편하게 부르라고. 두식이 역할로 캐스팅 됐으니까 열심히 하라고. 아, 그래도 괘씸하잖아. 하여튼 그렇게 된 거다. 그래도 권태형이 이것저것 설명을 많이 해줬다. <우리 형> 끝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극단이 많이 어려워져서. 대표가 와서 우는데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내려가서 연극을 했지. 그러니까 또 영화에서 일한 게 없어졌다.
전: 그걸 발판으로 영화를 계속 했어야 했는데. 다시 공백이 생긴 셈이다. 아쉽지는 않았다. <야수> 단역부터 시작했지. 그 때 권상우와 다시 만났지. 상우 씨가 나를 기억하더라고. <말죽거리 잔혹사> 때 같이 하지 않았냐고. 그 친구 사람이 됐더라고. 기억을 해! (웃음) <야수>를 마치고 나서 <강적> <비열한 거리> <폭력서클>을 이어서 하게 됐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포스터에도 얼굴을 내밀었지. 나는 그거 하면 좀 될 줄 알았다. (웃음)
전: 메인으로 왔다는 의미니까. ‘그래, 이제 끝났구나’ 싶었는데. 안 되더라고. 하여튼 그렇게까지 올라가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