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식객의 맛집놀이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눈물 젖은 순대를 먹어본 적이 있는가. 길거리 포장 젖히고 들어가 오뎅 국물 후후 불어가며 소금에 찍어먹는 그 순대 말고, 실은 진한 돼지 뼈 국물에 통통한 새우젓 풀고 매운 청양고추 송송 다진 것 뿌려서 뜨끈한 기운 뱃속으로 밀어넣으면서 그래, 살아야지. 먹어야 산다, 하며 눈물 젖은 숟가락 퍼올린 적 말이다.::순대, 새우젓, 순댓국집, 음식, 엘르, 엘라서울, elle.co.kr:: | ::순대,새우젓,순댓국집,음식,엘르

순대를 떠올리면 왠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돼지 몸에 붙어있을 때에는 뼛골 빠지게 음식물 실어 나르며 간 쓸개 몸안 곳곳으로 영양분 내보내다가 또 돼지와 작별하고 나면 다시 꾸역꾸역 갖은 재료 품어 누군가의 든든한 한끼 식사가 되는 그 녀석. 여느 장기보다 열심히 일하지만 여느 장기만큼 대접도 못 받고, 음식으로 내놓아도 귀한 음식 대접 받기 보다는 싸고 푸짐한 서민음식으로 낮춰보니 서러움마저 들 때, 있다. 순댓국이냐 감자탕이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아슬아슬한 쌍벽의 해장 지존이지만 몸이 더 좋아하는 것을 대라면 슬쩍 순댓국의 손을 들어준다. 맑고 진한 육수에 둠벙둠벙 썰어넣은 순대와 돼지 부속, 거기에 매운 청양고추 송송 다진 것 듬뿍 넣어 칼칼하게 만들고 통통한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면 준비 완료. 남들 다 넣는 고춧가루 다대기나 들깨가루는 안 넣는다. 순댓국의 진미는 깊고 시원한 육수에 달려있으니 그 맛 그대로 맛보려면 새우젓 간으로 충분하다. 간혹 순대만 달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국물 맛은 순대와 고기가 적당히 섞여야 제 맛이다. 하지만 아무리 국물 맛이 좋아도 식용비닐에 선지 바른 당면 꾸역꾸역 넣은 길거리 순대가 동동 떠 있는 순댓국은 사절이다. 아우라가 뿜어져나오는 순댓국집이 있으면 무조건 들어가보지만 길거리 순대가 동동 떠 있으면 숟가락 내려놓고 서둘러 도망치듯 빠져나오곤 한다. 무늬만 순대인 척하는 그 놈이 흡사 나일론으로 만든 아기 기저귀라는 것을 깨달은 건 대학교 입학 후 신촌에 있는 구월산 왕순대를 접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젖살 뽀얀 얼굴로 얼결에 복학생 선배를 따라가 철제 원형의자에 앉아 순댓국 한 그릇과 모둠순대를 먹고 내 평생 반려자로 순대를 맞아들인 것이다. 그래, 암. 순대가 이런 거지. 순대가 이런거니까 비슷한 아류들이 그렇게 길거리를 메웠던 것이겠지. 순대가 왜 맛있는 음식인지 품고 있던 의혹이 한순간 풀렸다. 양복쟁이들 사이에서 소주잔 한 모금 들이키고 캬, 순댓국 한 사발 들이키고 캬, 괜히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순댓국집에는 의례 술국이 있다. 순댓국하고 별반 차이도 없는데 고기 양이 좀 많고 밥이 함께 말아나오지 않는다. 안주용 순댓국이란 얘기다. 그 시절 술국 하나 시켜놓고 “아줌마 여기 국물 좀 더주세요.”하면 국물만 주나. 거기에 고기 건더기 몇 점 더 딸려 들어오고 그러면 또 그걸 안주 삼아 술국 하나에 밤이 새곤 했다. 아, 막걸리와 순댓국, 감자탕 등으로 점철된 나의 학창시절이라니….순대의 역사가 궁금해서 좀 찾아봤다. 안동 장씨 부인이 노안으로 침침한 눈인데도 각종 음식 만드는 법을 꼼꼼하게 적어놓은 (1670)에는 개순대, 즉 개장(拘腸)이 나온다. “개를 잡아 깨끗이 씻어 슬쩍 삶아 뼈를 발라 만두소 버무리듯 해서 후추, 천초, 생강, 참기름, 진간장을 한데 섞어 질척하게 한다. 개 창자를 뒤집어 말끔히 빨아 다시 뒤집어 거기다 가득히 넣어 시루에 담아 한나절 뭉근히 쪄내서 어슥어슥 썬다. 초와 겨자로 곁들여 먹으면 가장 좋다.” 19세기 말 에는 지금 우리가 먹는 순대의 원형에 가까운 이야기가 나온다. 순대는 육류를 다져 넣은 소시지에 비해 각종 채소가 골고루 들어가 동, 식물성 영양분을 고루 섭취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채소음식인 김치에 굴이나 생선, 젓갈 등을 넣어 비타민과 단백질을 동시에 흡수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영양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놀라운 측면이 있단 말씀. 알칼리성 채소가 많이 들어가 비타민과 섬유질이 풍부하기 때문에 숙취해소, 중금속 등 독성해소에 좋다. 철분 함량이 높아 임산부나 빈혈 환자에게도 좋은 음식이다. 지치고 서러운 날 왜 내 몸이 순댓국을 원하는지 알겠지? 팔도의 음식들이 4대강처럼, 고속도로처럼, 획일화되고 있는 마당에 그나마 순대는 고유의 지방색이 아직 죽지 않은 음식에 속한다. 실향민 1세대가 주민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던 속초 아바이마을은 아바이순대가 명물이다. 대창을 사용해 보기만 해도 푸짐하고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함경도음식이 실향민들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함경도 사람들은 명태 순대를 잘 해먹었다. 생선 입을 열어 내장과 뼈를 발라내고 소를 채워서 찌거나 삶아 한겨울 내내 요긴한 찬으로 삼았다고 한다. 주머니에 뭔가 집어넣는 본능은 오징어순대에서도 빛을 발한다. 예천의 용궁순대는 소창도 대창도 아닌 돼지 막창을 이용한다. 살이 통통하고 씹는 맛이 쫄깃해 요것도 명물이다. 제주도의 순대로 알려진 수애는 쌀이나 찹쌀 대신 메밀이나 보리가루를 선지와 섞어 쪄낸다. 야채를 거의 안 넣고 모양도 단순하고 맛도 퍽퍽해 초간장을 찍어먹는다. 먹을 것이 귀했던 제주도에서 결혼잔치만큼은 정말 한 상 부러지게 2박3일 동안 지치지 않고 계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수애는 남도의 홍어처럼 잔칫상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유관순 열사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아우내장터를 근거지로 하고 있는 병천순대는 천안의 대표적 음식으로 30여 곳의 순댓국집들이 성업 중이다. 용인 백암순대에 비해 선지함량이 높아 거무스름하고 고기와 비계를 같이 갈아넣어 맛이 좀 더 부드러운 편이다. 가장 큰 특징은 대창을 쓰지 않고 소창을 쓴다는 점. 머릿고기를 다져넣어 씹는 맛이 살아있는 백암순대는 야채가 듬뿍 들어가 무난하게 먹을 수 있다. 지방마다 순대의 스타일이 다르듯 찍어먹는 양념도 다르다. 간혹 순대를 막장에 먹는다더라, 희한하게 소금에 찍어먹더라, 하며 제 지방의 것이 법이요 진리인 줄 알고 우기다가 문화적 충격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도 더러 있었다. 강원도와 경북지방은 새우젓이나 후추 섞은 소금, 전라도 지역에서는 초장에 찍어먹거나 하얀 소금을 찍는다. 경상도가 막장이나 토장, 제주도는 초간장인데 요즘은 초장도 대세란다. 순대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은 순대 특유의 비릿한 냄새를 싫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선지의 신선도에 달렸다. 좋은 순대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난다. 고소하고 달콤한 맛. 그러니 좋은 순대를 맛봐야 한다. 그리고 나서 순대에 대한 자신의 기호도를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괜스레 이상한 순대 먹고 순대는 싸구려 음식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평생 사는 것은 본인만 손해다. 본 식객은 즐겨가는 동네마다 찾는 순댓국집들이 있는데 최근 아주 썩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 바로 집 앞에 있는 용인순대국이다. 행복을 찾으러 세상을 돌고 돌아온 주인공이 집에서 파랑새를 발견한 것처럼,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처럼, 고수는 내 옆에 있었다. 내 그대를 두고두고 사랑하리다. 오늘도 발걸음은 그곳으로 향한다. *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6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