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힘을 허하라, 문훈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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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힘을 허하라, 문훈

여체를 본뜬 건물, 쪼개진 커피콩 안에 들어선 도시, 꼬리를 휘날리며 날아가는 집, 한 조각씩 땅에서 일어나 합체하면 로봇이 되는 펜션, 개미집 같은 공간이 가득 찬 인공 산. 말도 안 된다고? 건물이란 무릇 땅에 뿌리를 박고 서 있어야 하며 네모반듯해야 한다고? 건축가 문훈은 묻는다. 왜 안되냐고.

ELLE BY ELLE 2010.06.01

몸과 건축, 그리고 판타지
지난 달 문훈은 남산 N타워 옆에 이상한 조형물을 하나 설치했다. 이름 하여 ‘Temple of Wind’. 바람의 사원이다. 세찬 바람에 날리는 여자의 긴 머리채 같기도 하고, 흑백 격자무늬 옷을 입은 커다란 다슬기 같기도 한 조형물 안은 공교롭게도 비어 있다. 그 안으로 바람이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안을 들여다보면 바람 부는 들판을 담은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바람 소리도 나고 천둥소리도 난다. 문훈이 바람을 이야깃거리로 삼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언젠가 하늘을 나는 집을 그려냈다. 문득 땅에 붙박여 있기 싫다고 마음을 정하고 부스스 일어난 것인지, 그 집은 흙 속에 파묻혀 있던 파이프와 철근 따위를 뒤로 하고 유연한 꼬리처럼 훌훌 날아간다. 날아가는 집은 양평 주택 ‘S-마할’로 실현되었다. 이 집의 모형은 문훈건축발전소 천장에 매달려 여전히 날고 있지만, 실제 집은 땅 위에 별 탈 없이 붙어 있고 그 안에는 사람들이 산다. “어릴 때 기억이 있어요. 바람 부는 날 어딘가에 서 있으면 기분이 좋잖아요. 바람을 맞는 느낌이 좋고, 그 느낌이 무언가 생각나게도 하죠.” 그의 머릿속에 부는 바람은 건축이란 모름지기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고집스러운 고정 관념들을 날려버리려 하는 것일까? “바람에 움직일 수 있는 건축물이 있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건축이란 기본적으로 사람이 살기 위한 공간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건축은 감정적인 임팩트를 줄 수 있는 것,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전달하는 건축이에요. 보통 건축은 정적인데 바람이라는 주제는 동적이잖아요. 바람에 움직이고 반응하는 것, 살아있는 것에 관심이 가요. 건축이 꼭 어떠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까. 사람에게도 안정되고 싶은 동시에 방황하고 싶은 양면성이 있지 않나요.”
그가 2000년부터 설계한 건축물은 52개 정도. 그중 지어진 건물은 20개다. 주택 재개발 프로젝트인 ‘블랙 다이아몬드 펜트하우스’나, 상하이 탱의 플래그십 스토어로 설계한 ‘옹달샘’은 계획이 진행되다가 현재 잠정적으로 실행이 중단된 상태다. “이상하게도 지어진 건축에 대해서만 반응해요. 지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아이디어라도 아이디어일 뿐이죠. 지어지지 않은 건축을 사람들이 인식하기는 어려우니까.” 건축은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대형 프로젝트다. 돈을 대는 건축주의 입맛에 맞추려면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형태를 갖추고 땅에 자리를 잡는 건축물보다 아이디어로 그치는 건축물이 훨씬 많다. 그래서 문훈은 실현하지 못한 자신의 건축물과 실현된 건축물 중 마음에 드는 것을 합체해 로봇을 만들었다. ‘어반 로봇'이라 이름 붙여진 이 로봇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현대고등학교와 묵동 다세대 주택, ‘S-마할’과 ‘옹달샘’이 있다. 사진가 강영호의 스튜디오로 지어져 2005년에 건축가협회상을 받은 ‘상상사진관’도 있다. 물론 정말 이런 로봇이 있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의 그림 속 이야기다.
그림을 그릴 때 문훈은 자유롭다. 건축은 이것저것 고려할 것이 많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림 그리기는 문훈과 드로잉 노트 둘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몇 권이나 되는 그의 몰스킨 노트에는 기상천외한 그림들이 가득하다. 작업실 벽에 걸린 좀 더 큰 사이즈의 그림들에서는 노트 속 아이디어가 아예 본격적으로 실체를 드러낸다. 그림들은 저마다 바람에 펄럭이듯 흔들리고, 유기체가 자가 증식하듯 꿈틀댄다. 한강에 걸쳐진 다리는 마치 강물인 양 물결친다. 그림을 가만 바라보고 있자니 영화 <아키라>에서 주인공 소년이 부글부글 끓듯이 부풀어 오르다 폭발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어느 하나를 깊이 파고드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그게 안 돼요. 그냥 어떤 뉘앙스만 있으면 돼요. 향기가 뿜어지면 세상이 생각나는 거죠. 라일락 향기를 맡으면 라일락 새싹이 보이고. 그러면 만족. 라일락에 대해 더 이상 알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나는 내부에 라일락 향기로 자극을 받아 작동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는 거예요.”
문훈이 설계하고 실제로 완성한 건축물 중에 외양이 유난히 발칙한 것을 꼽자면 강원도 정선에 있는 펜션 ‘락있수다’가 있다. 이 건물은 언뜻 보면 놀이공원이다. 여러 채가 병렬로 늘어선 ‘락있수다’의 어느 건물에는 거대한 황소 뿔이 달렸고, 옆 건물에는 부엉이 눈도 달렸다. 심지어 바람에 펄럭이는 긴 꼬리도 줄지어 길게 뻗었다. 어른 셋이 들어갈 수 있는 꼬리 안에서 여름에는 잠도 잘 수 있다. 노란색, 분홍색, 파란색, 빨간색, 모든 건물이 다른 색이고 모든 방은 다르게 생겼다. 한 마디로 제멋대로다. 하지만 이 건물이 그저 문훈의 상상 속에서 제멋대로 나온 건 아니다. 이 건물이 들어선 땅을 처음 보러 갔을 때 문훈이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주변의 산세와 강, 숲과 밭이었다. “아이디어는 땅의 형태, 풍경, 거기서 오는 느낌에서 나와요. 아니면 원래 머릿속에 있던 것이 툭! 그 장소에 맞아 떨어지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아이디어가 나오는 건 빨라요. 1년에 356개를 디자인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만큼 일이 많지 않으니 오히려 다행이란다. 그래서 남은 아이디어들이 드로잉 노트 안으로 들어간다고. “통제가 없나 봐요. 문 여러 개가 닫혀 있는 사람은 맞춰서 문을 열어야 뭔가 들어올 텐데 나는 문을 전부 열어두고 뒤죽박죽 하다가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하고 즉흥적으로 떠오르기도 하죠. 현장에 가면 이미지가 떠오르는 거예요. 라디오 주파수가 맞으면 방송이 나오는 것처럼.” 그의 드로잉은 기묘한 아이디어를 담고 있지만 그의 건축물들이 그림처럼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것은 아니다. “저는 최소한도로 개입하고 대신 상황이 디자인하게 만들어요. 대지의 형태, 예산, 건축주의 요구. 건축주가 방 3개를 만들어달라고 하면 방 2개를 크게 만들라고 제안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어쨌든 방이 3개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요. 예를 들어 비빔밥을 만드는데 딸이 참치를 넣어달라고 하면 내가 싫어해도 넣고, 날치알도 넣어달라고 하면 넣어요. 대신 비비는 건 내 방식으로 비비겠죠. 귀찮으니까 흔들자. 그게 전혀 예상 밖의 결과로 도출되는 거예요. 상상 이상의. 그렇게 흔들어서 이상한 밥이 나왔는데, 야 이거 뭐냐, 새로운 음식인데 진짜 맛있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만들어지는 문훈의 건축은 어느 한 구석도 서로 닮아있지 않고, 낯설고 기묘하다.




한강 다리 아래로 상상력이 흐르네
건축가 문훈에게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한강 다리 밑이다. MIT 대학원에서 졸업 작품 설계를 할 때도 그는 동호대교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동호대교에 처음 관심 가졌던 계기는 옛날 제례 의식에 대한 기억이다. 그가 어렸을 때 보았던 장례는 죽음에 대한 굉장한 퍼포먼스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장례든 사진에서 주인공만 바꾸고 배경은 같은 것처럼 치러진다. 영 재미가 없다. 그래서 그는 어디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마치 갠지스 강이 그러하듯, 서울이라면 한강이 적당할 것 같았다. “서울 땅에는 모두 주인이 있잖아요. 누군가에 의해서 소유되지 않은 장소가 한강이고 다리죠. 그래서 조금은 무정부적일 수 있는 공간이에요. 점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가져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데서 상상이 시작됐어요. 미국에 있으면서 한강 소재를 선택한 이유는 그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고 관심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다리 밑 공간이 기둥들로 구성되잖아요. 줄지어 늘어선 다리, 열주에 리듬이 있으니까 이미지로서 파워풀하거든요. 게다가 서울이지만 한산한 느낌도 있고, 아름다워지려 하지 않는 공간이고.”
일부러 디자인하고 정돈한 길, 곱게 단장한 공간은 그의 눈에 차지 않는다. 차라리 대단한 디자인 없이 만들어진 간판들이 충돌하는 골목길이 좋다. “예를 들어 가로수길 같은 공간은 진실은 감추고 하하하, 네네네, 하는 곳이에요. 그런 상태는 불편한 거잖아요. 엄마 집에 있고 친한 친구랑 같이 있을 때 편안하죠. 다리 밑도 그런 공간인 거예요. 다리 위는 신경 쓰지만 다리 밑이 어떻게 보이나는 별로 신경 안 쓰거든요. 그래서 더 멋있어요. 예쁘장한 공간들이 나쁘다는 건 아닌데, 별로 찾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오히려 황량하거나 뜯어져 있거나 솔직한 길. 그런 곳에 틈이 있어요. 내가 생각할 여유가 있는 틈. 틈이 있어야 건축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틈이 없으면 어디에 뭘 세워요.” 그는 여행을 할 때도 완전히 개발된 나라에는 흥미가 없다. 차라리 덜 발달되고, 틈이 있는 나라를 자꾸 찾는다. 사람도 틈이 있어야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문훈은 숨 쉴 틈 있는 공간이 좋다. 그래서 마치 사춘기 청년 같던 도시를 부잣집 아들처럼 매끈하게 다듬어버리는 ‘디자인 서울 프로젝트’가 그에게는 재미없는 일이다. “서울의 매력은 디자인이 안 되었다는 데 있어요. 디자인 서울이 되면 나는 서울이 싫어질 것 같아요. 디자인이라는 건 충돌을 없애고 정리하는 거니까 지겨워지는 거죠. 남산 타워가 N타워가 되면서 좋아지긴 했지만 원래 있던 싸구려 느낌, 축제의 느낌은 없어졌어요. 거친 공간에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재미있죠. 디자인 서울은 재미가 없어요. 내 일거리가 줄어도 상관없어요.”
문훈이 지금 있는 작업실을 차렸을 때 한동안 이웃들은 기웃거리고 불평을 해댔다. 이상한 집이라고, 온통 빨간색인데다 작업실 바깥 전면에 드리운 빨간 망사 커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이웃들에게 문훈은 이렇게 말했다. 돈을 대면 망사 커튼을 흔들리지 않는 소재로 바꾸겠다고. 그러고 나서는 이웃들도 잠잠해졌다.
평범한 집과 작은 사무실과 가게들이 줄지어 선 골목에 시뻘겋고 기묘한 공간이 들어섰으니, 이웃들이 탐탁지 않아 할만도 하다. 도무지 건축사무소 같지 않은 그의 작업실은 온통 빨갛다. 벽과 책장, 모든 것이 빨간 한통속이다. 간간이 금색이 끼어든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사준 빨간 테이블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사실 정말 근원은 몰라요. 그냥 빨간색이 좋은 걸요. 금색도 좋아해요. 둘 다 태양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내가 뭘 상징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림을 그릴 때도 다른 색이 가끔 끼어들지만 빨간색, 금색, 검은색, 흰색 네 가지가 주조를 이뤄요. 무슨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좋아서 그런 거죠.” 마치 시공간 연속체가 비틀어지면서 기묘한 빨간 방에 빠진 것처럼, 그 안에 들어서면 바깥세상에서 있던 일들은 자연스레 잊힌다. 어디에 앉을지 알 수 없다. 어디에든 앉아도 되고 누워도 된다. 반 고흐가 노란 방 안에서 미치광이가 되었다면 문훈은 빨간 방 안에서 ‘변태’가 되는 것일까? “여기 있는 모든 물건에 제자리가 있어요. 이곳도 내 캔버스니까요. 3차원 캔버스. 이렇게 만들어놓고 왜 다른 곳에 가서 놀아요. 여기는 거미집이에요. 거미는 거미집에 있는 거고. 기본적으로 아티스트는 자기의 세상을 만들고 그 안에 살려고 하죠. 저 같은 경우에도 제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살려고 해요. 건축이고 나발이고 이전에, 그런 욕망에서 출발하죠. 지금은 없지만 부족한 것들을 상상해 만들려 하는데, 그게 미래인 거죠. 미래는 지금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일 테니까.” 문훈은 건축가이기 때문에 미술 사조와 상관없는 그림 그리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미술가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틀에 매이지 않으면서 그림도 그리고 설치 미술도 한다. 그러는 동안 경계는 없어진다. “이쪽저쪽을 왔다갔다 하면서 놀 수 있는 거죠. 미꾸라지처럼. 미술가라고 했다가, 너 미술가 아니잖아 그러면 건축가라고 하고. 이중생활을 계속 갖고 가려고 해요. 하하.” 그러는 동안 문훈은 진화한다. 혼자 그리는 그림에서 제멋대로의 상상력이 꿈틀대며 스스로 자라게 내버려두듯이, 자신이 원하는 건축으로 좀 더 가깝게 가기 위해. 경계를 오가며, 껍데기를 벗든 입든, 모양을 바꿔가며, 그는 계속 ‘변태’하는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6월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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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WORDS 류한원
    PHOTO 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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