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냥한' 나를 사랑했다. 여성스러움을 바탕으로 내 남자에게 헌신하는 그 역할을 나는 사랑했다. 내 남자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서 기꺼이 나를 낮추고 나의 욕구도 드러내지 않았다. 함께 있을 때 까다롭지 않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서 나를 억눌렀다. 내 남자를 으쌰으쌰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의외로 연애에서 상냥함은 다른 인간관계에서만큼 보답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엄마의 보살핌을 받다 연인인 나의 보살핌으로 자연스럽게 넘어온 남자들을 내가 그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것도 잠깐, 점차 당연하게 여겼다. 주고 받는다는 기본적인 소양조차 가지지 못한 남자들이 많았다. 연애가 아니라 일종의 양육이었다. 내 남자의 사소한 일상부터 감정까지 상냥함 모드를 가동한 채 돌봐주는 일은 엄청나게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나의 상냥함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억울함이 밀려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스스로 기꺼이 한 일이면서 보답을 받지 못하니까 좌절감을 느꼈다. 관계에서 불만을 느끼고 불만족 상태가 지속되면서 나의 상태가 분열되기 시작했다. 실제의 나는 못되게 굴 수도 있지만 이렇게 최대한 노력하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결국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관계를 망친 것이라는 변명을 만들고 싶었다. 안전한 위치에서 적당히 상냥하고 적당히 친절하게 그들을 대하고 그에 반응해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며 조금이라도 다칠 기미가 보이면 나는 선의를 가지고 대했는데 이별의 단서를 제공하는 네가 나쁜 것이라고 매도하곤 했다.
이건 똑바른 관계가 아니었다. 아무리 상냥함은 위선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지만, 이건 콜센터의 영혼 없음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연애를 위한 상냥함을 가동하고, 상대와의 상호작용보다 스스로 상냥함의 체력이 다하면 상대를 탓하며 이별하는 수순이었다. 결코 사랑스럽지 않은 마음가짐으로 사랑을 하고 사랑 받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느 순간 나의 잘못을 깨달았고 수치스러워졌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여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공통점을 파헤치다 보니 다른 양상을 보이는 여자들과 달리 ‘무리’하고 있었다. 자발적이라고 하지만 관계에서 지나치게 상냥했다. 그런데 그 상냥함이라는 것도 교묘하게 여자들에게 부과된, 일종의 연애 역할로써의 태도였다. 지금도 꽤 많은 여성지의 연애 상담 지면에서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태도들이다.
남자의 사랑을 받으려면 남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방법으로 자신의 요구를 최대한 직설적이지 않고, 친절하게 드러내라는 식으로 조언한다. 싸워서 분란을 일으키기 보다는 미소와 상냥함으로 남자를 어르고 달래서 조정을 하라고 말한다. 그 잘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남자들을 위해서 목소리를 낮추고 웃는 얼굴로 혹시라도 자존심이 상할 말은 삼가야 남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놈의 자존심은 남자에게만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연애는 두 사람의 요구를 타협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은 달콤하기만 한 것이 아닌 투쟁의 장이며 각자의 희생과 배려가 뒤따라야 하는 일인 것이지 일방적으로 여성이 맞춰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연애에 있어서 ‘여성스럽다’는 기질을 남성편의적으로 이용하고 세뇌하고 있는 사회에서 나답게 연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상냥하지 말라고 해서 퉁명스럽고 도도한 표정을 짓고 늘 싸울 준비를 한 상태로 남자를 대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굳이 상냥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조차 착하게 굴어야 남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할 때는 여성스러움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도리어 무능력하다고 평가를 하면서, 사적 관계에서 여성스러움에 기대고 의지하려는 남자들에게 이용당하지 말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