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와 싸우는 북클럽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는 '여혐말살클럽'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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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떨 때 책을 읽고 싶어집니까?’ 출판인은 언제나 이게 궁금하다. 몇몇 장서가를 제외하면 사람들은 내용이 궁금한 것만으로 책을 사지는 않는다. 어떤 책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읽기 위해 구매하는 것, 실제로 그 책을 읽는 것 전부가 다른 문제다. 각각의 결정 과정에는 사람마다 제각각의 이유가 있을 텐데 몇 년 사이 ‘읽고 싶다’와 ‘책을 사서 읽는다’ 사이의 간극에서 내가 크게 체감한 독자 정서는 피로감과 회의감이다. 즉 “재밌겠다. 근데 이걸 읽을 기력이 없다.” 하물며 돈까지 써가면서 피곤을 더하고 싶지 않다는 망설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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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출판인으로서 느끼기에 대중 독자들은 점점 페미니즘을 일상과 분리하고 있다. 알면 오히려 괴로워진다는 직접적인 토로도 들었다. “예전엔 같이 열심히 읽고 얘기하던 친구들도 이제 페미니즘 얘기를 안 해요.” 이 얘기는 정말 많이 듣는다. 게다가 두말할 것 없이 공감한다. 내 주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페미니즘 출판사는 무얼 해야 할까? 나는 ‘그럼에도 꾸준히 읽기’를 선택하는 독자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출판사 봄알람의 자체 북클럽 ‘여혐 말살 클럽’은 그렇게 시작됐다. 2025년 9월부터 12월까지 네 번에 걸쳐 각각 ‘저항하는 여성들의 삶’ ‘가부장제’ ‘권력형 성폭력과 사회적 연대’ ‘성매매와 여성 상품화’를 주제로 총 10시간 동안 거의 스무 권의 책을 다뤘다.
“여성 혐오와 싸우는 독서인을 위한 북클럽, 여혐 말살 클럽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매 회차는 이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어떤 페미니스트인지’ 각자 소개하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손가락질당하는 ‘페미’라는 정체성은 이 북클럽의 참석 조건이다. 모두 각자의 고민을 바탕으로 페미니스트인 나를 내보인 자리에서 정확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논의를 확장하는 시간은 매번 빠르게 흘렀다.
처음 여혐 말살 클럽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참여자 모집을 시작했을 때는 희한한 관심도 많이 받았다. 여성 혐오를 말살하겠다는 모임 이름이 누구의 심기를 어떻게 건드린 것인지 SNS에서 게시물 비공개 인용 수가 소름 끼치는 속도로 치솟았고, 무지성 조롱이 이어져 결국 댓글을 막기도 했다.
하지만 모임 취지는 우리가 말을 걸고 싶었던 이들에게도 정확히 닿았다. “여혐 말살 클럽에 함께하고 싶은 이유는?” 참가 신청서의 질문에는 다양한 대답이 달렸지만, 본질은 같았다. “여혐을 말살하고 싶다. 이대로 살 수는 없다.” 신청자를 추려 매회 6~10명의 소인원으로 진행했는데, 생각 외로 전국 각지의 독자들이 기꺼이 모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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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을 기획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해방감과 지적 자극이다. 참여자들이 ‘이런 말을 할 곳이 없다’고 느끼던 고민을 마음껏 털어내는 자리로 만들고자 했고, 필요한 지식과 논의를 제공해 더 읽고 더 알고 싶다고 느끼기를 바랐다. 현실에 대한 유의미한 비판과 저항, 나아가 변화가 가능하려면 개개인의 앎이 바뀌어야 한다는 건 대전제다. 하지만 사회 상식이 성차별적이다 보니 차별을 분별하는 능력치가 높아질수록 골치가 아프기도 한다. 이게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의 딜레마다.
그 때문에 이런 자리가 필요하다. 성차별적 상식을 용인하지 않는 자리에서 우리를 위한 지식을 바탕으로 상식을 쌓아야 한다. 이런 대화가 있을 때 비로소 페미니즘 지식은 피로와 부담이 아닌, 즐거움이 된다. 실제로 한 참여자는 “주변인들은 아예 알아듣지도 못하는 개념을 이미 이해한 사람들과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며 웃었다. 나름 심각한 고민을 나누던 와중에 등장한 ‘행복’이라는 표현에 모두 와르르 따라 웃었고, 그 순간 공간을 채운 웃음소리는 행복이 분명했다.
페미니즘은 지구상의 여성들이 아직 누려보지 못한 기본권을 요청하는 지식과 실천이다. 그런 지식을 ‘알수록 피곤하다’고 느끼는 사회라면 문제가 있다. 내가 만나온 여성들이 호소하는 이런 딜레마는 그 자체로 여성들의 삶에 대한 탄압임을 강조하고 싶다. ‘그것 봐, 너도 피곤하잖아? 그만 읽고, 그만 생각하고, 좋게 좋게 넘어가’라고 일상의 조건들이 속삭일 때 ‘아니, 못 넘어가’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럼 우리 어떻게 살까?’를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내 삶에 진정 도움이 되는 일이다.
반년을 공들인 봄알람의 첫 북클럽은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 여성들의 삶을 옥죄는 다양한 차별과 혐오, 폭력의 주제들을 읽고 분노하면서도 웃음과 기쁨이 끊이지 않는 북클럽이었다고 자평하고 싶다. “여혐 말살 클럽에 참여한 뒤에 페미니즘 공부를 다시 열심히 하고 싶어졌다”는 참여자 후기는 찡하기까지 했다.
세상에 열받아서,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읽기와 멀어졌던 독자의 의욕을 다시 지폈다는 직접적인 피드백은 출판인으로서도 큰 동력이 됐다. 페미니즘 지식이 힘과 즐거움을 준다는 걸 나 역시 다시 믿을 수 있게 됐다. 안전한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정말 큰 힘이 됐다는 참여자들의 후기를 그대로 돌려드리고 싶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이두루
」페미니스트 출판사 봄알람 대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 등을 펴냈다. 현실을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글 이두루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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