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숫가에서 만난 이영애
걸어온 길 위로 빛과 바람이 머문다. 파비아나 필리피에 실은 이영애의 가장 자유로운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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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에 선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 같아요. 배우들은 화보로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아요
저는 화보 작업을 새로운 옷을 입고 그 옷에 맞는 색을 ‘액팅’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파비아나 필리피의 옷처럼 의상이 지닌 색과 결, 고유한 에너지를 어떤 캐릭터로 표현할지 늘 고민해요. 배우로서 그런 감각을 탐색하고 살려내는 작업이 즐거워요.
작품에 몰입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네요
제 경우에는 그래요. 스무 살에 화장품 모델로 데뷔했는데, 배우로서 참 행복한 일이지만 그때의 저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옷으로 더 많은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요(웃음). 화보 작업은 여전히 재미있네요.

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와 마이크로 시퀸 장식 캐시미어 스웨터, 니트 팬츠는 모두 Fabiana Filippi.
그간 비범하고 거친 여성을 많이 그려왔지만 <은수 좋은 날>의 은수는 조금 달라요. 범상치 않은 일에 휘말리지만, 그저 가정을 지키려는 평범한 인물에 가깝더군요
맞아요. 전작 <마에스트로>의 지휘자 차세음도, <구경이>의 전직 형사 구경이도 강렬한 캐릭터였는데, 이번에는 땅에 발을 붙인 현실적인 인물을 연기해 보고 싶었어요. 마침 은수는 저와 나이대도 비슷하고, 아내이자 엄마이자 평범한 이웃이라는 데 끌렸어요. 저와 비슷한 면이 있어 현실적 감정을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을 것 같았고요. 그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할 수 있는, 피치 못할 상황과 맞닥뜨려 ‘나라면 어땠을까?’ 하고 고민할 수 있는 현실적 문제를 겪어요. 그 속에 다양한 감정의 결이 있어 그 복합성을 연기하는 과정이 흥미로웠죠.

화이트 새틴 슬리브리스 드레스와 머리에 두른 스카프, 스웨이드 미니 토트백, 나파 레더 하이힐 부츠는 모두 Fabiana Filippi.
은행원 차림에 환하게 웃는 모습이 이영애 같으면서도 낯설게 느껴졌어요. 의상을 통해 일상성을 표현하는 일도 하나의 과제였나요
옷도 연기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평범한 모습을 그리지만, 초반에는 화사한 파스텔 톤의 옷으로 밝고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다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은수가 무너지는 과정에서는 어둡고 무드 있는 옷을 입었어요. 옷으로 은수의 감정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신경 썼어요.
우연히 손에 쥔 마약 가방으로 얽혀버린 이경 역의 김영광 배우와는 적인 듯 동지인 듯 묘한 케미스트리를 보여줬어요. 촬영현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영광 씨의 연기는 어딘지 신선한 점이 있어 시너지를 얻었어요. 끊임없이 신뢰와 배신, 협력을 오가는 두 캐릭터의 관계성이 신선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지 않았나 싶어요. 영광 씨는 패션모델 출신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멋있지 않나요. 어떤 스태프들은 영광 씨 보는 맛에 현장에 왔다고도 했어요(웃음).

체크 패턴 더블 브레스티드 코트와 캐시미어 스웨터, 나파 레더 하이힐 부츠, 너깃 장식 브레이슬릿은 모두 Fabiana Filippi.
은수는 회차가 거듭할수록 점점 벼랑으로 내몰리죠.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한 마디 건넨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누구나 그럴 수 있어. 그러니 이해한다.” 무엇보다 용기를 가지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베이지 캐시미어 케이프와 스웨터, 와이드 팬츠, 스웨이드 토트백, 플랫 슈즈는 모두 Fabiana Filippi.
좋은 말이에요
요즘 현실이 꽤 무겁고 어둡기 때문에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분명할 거라고 생각해요. 마약을 소재로 다루지만, 어쩌면 그건 우리 주변에 도사린 보통의 이야기죠. 그 문제에 대한 논의를 화두로 꺼내 함께 풀어가야 할 시점인 것 같아요. 다 함께 보면서 해결점을 찾고, 사회적 이슈거리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무거운 주제지만, 그렇다고 다큐멘터리처럼 무거운 드라마는 아니기 때문에 모든 분이 어렵지 않게, 끝까지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지난봄과 여름에는 <헤다 가블러>를 통해 오랜만에 연극에 도전했어요. 이 여정으로 무엇을 발견했나요
꼭 꿈꾸는 것 같았어요. 연극은 시간과 비싼 노력을 들여야 볼 수 있는 장르잖아요. 아주 멀리서, 바쁜 와중에도 찾아와주신 관객들이 너무 감사해서 끝까지 남아 사인해 드렸어요. 연극이 힘은 몇 배로 더 들었지만 그만큼 황홀했고, 어느 작품보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을 했어요. 그 시간이 좋은 동력으로 작용해서 다음 작품 때는 더 열심히 나아갈 수 있겠다는 확신과 힘을 얻었어요.

시어링 포켓 디테일의 화이트 케이프와 스퀘어 스티치 디테일의 스웨터, 와이드 팬츠는 모두 Fabiana Filippi.
연극 무대는 관객 가까이에서 표정 하나하나를 마주할 수 있어 새로운 감흥이 일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영화나 드라마는 수많은 테이크 중 가장 좋은 걸 뽑아 편집한다면, 연극은 매번 날것일 수밖에 없어요. 늘 긴장하고, 가끔 아쉽기도 해요. 영원성이 없는 장르니까. 제 연기를 직접 볼 수 없으니 미묘하더군요. 다 끝내고 보니 아직도 꿈꾼 느낌이에요. 그간 작품으로 느껴오던 것과는 또 다른 흥분과 보람이 있었어요.
연극을 위해 한 달 동안 연습한 이후 리허설 녹화 영상을 보고 스스로 너무 이상해 보여서 그날 밤잠을 설쳤다죠. 이후 동료들에게 액팅을 가르쳐달라고 했다는 일화도 놀랍기는 마찬가지고요. 여전히 무언가를 배우려는 사람 같아서요
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렵고 두려워요. 알면 알수록 제 단점이 선명하게 보이기도 하죠. 연극 무대를 하면서 그걸 더 실감했어요. 악몽도 꿨어요. 제가 무대 위에 서 있는데 관객이 다 나가버리거나 ‘그렇게 연기하면 안 된다’며 저를 꾸짖는 꿈 말이죠(웃음). 그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모든 약속을 미루고 연습에 몰두했어요. 동료 배우들의 치열한 연습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를 돌아봤어요. 배우로서 스스로를 다시 세운, 큰 전환의 순간이었습니다.

레드 컬러의 모헤어 스웨터와 셀로판 시퀸 아플리케 스커트는 모두 Fabiana Filippi.
<헤다 가블러>의 아름답고 당당하며 자유를 좇는 헤다와 <은수 좋은 날>의 은수, 만약 시대를 초월한다면 두 여성은 만나서 친해졌을까요
헤다는 정말 파격적이고, 초월적이고, 자기중심적 인물이에요. 색으로 치면 보라색에 가깝죠. 반면 은수는 노란색과 회색 중간에 있어요. 아주 현실적이면서 이상적인 인물 같거든요. 아쉽게도 헤다와 은수가 만나는 접점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네요(웃음).

간결한 싱글 브레스티드 코트와 새틴 슬리브리스 드레스, 스카프, 스웨이드 미니 토트백, 나파 레더 힐 부츠는 모두 Fabiana Filippi.
작품 속에서는 고요하거나 어두운 모습도 보이지만, 요즘 당신의 SNS를 보면 놀라울 만큼 생기가 느껴져요. 특히 텃밭 가꾸는 일은 즐겁나요
아이들이 태어난 뒤 양평 문호리에서 8년간 텃밭을 가꿨어요. 거기서 정말 큰 행복을 느꼈죠. 부엌에서 나가 호박이나 가지, 상추, 고추를 따 곧바로 된장찌개에 넣고 바글바글 끓여 먹으면 맛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어요. 서울에 와서 채소를 사 먹으니 맛이 없더군요. 유기농이라 해도 저렴하지 않고요. 갓 수확한 채소의 반짝이는 빛을 알고 나니 그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옥상에 조그맣게 밭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매일 자라는 가지와 꽃향기, 그 생명력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요.

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와 마이크로 시퀸 장식 캐시미어 스웨터, 니트 팬츠, 스니커즈는 모두 Fabiana Filippi.
당신의 연기에서도 같은 여성으로서 강렬하고 해방적인 에너지가 느껴져요. 반면 현실에서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따뜻하고 단단한 온기가 느껴지죠.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두 세계를 구분해야겠더라고요.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배우처럼 굴면 좀 그렇지 않나요(웃음). 아이 엄마들에게도 그저 아이 엄마로 다가가고 싶어요. 저도 카메라 앞에서는 활발하지만, 밖에서는 굉장히 ‘I’형이에요. 나가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소심하고 말도 적어서 존재감이 거의 없죠. 하지만 그 차이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결혼 초에는 제 세계에 머물러 있어서 사람을 만나는 게 조심스럽고 힘들었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외부와의 접점을 조금씩 배우게 됐어요. 그렇게 세상과 자연스럽게 섞여가는 과정이 배우의 삶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풍성한 모헤어 소재의 블랙 카디건과 스트라이프 패턴 시스루 스웨터, 데님 팬츠, 너깃 장식의 레더 벨트와 브레이슬릿은 모두 Fabiana Filippi.
누구든 자신의 삶에서 매일 크고 작은 도전을 이어가죠. 요즘 이영애가 도전하고 있는 것은
하고 싶은 게 많아요. 특히 프랑스 자수에 관심이 많아요. 집에 천이 많은데 버리기 아까워서 컵받침이나 테이블 매트를 만들고 싶지만 시간이 안 되네요. 가을과 겨울에는 자수를 배우고, 예전에 즐겨 치던 재즈 피아노도 다시 연주해 보고 싶어요. 틈날 때마다 영어 유튜브를 보면서 조금이라도 더 익히려 하고요. 이렇게 이야기하니 정말 많네요(웃음).

웨이브 라인을 따라 퀼팅을 더한 재킷과 스커트, 볼드한 이어링, 나파 레더 아일릿 백과 하이힐 부츠는 모두 Fabiana Filippi.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배우이자 사람 이영애는 지금처럼 세상과 호흡하고 있을까요
그럼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이대로요.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다시 나누고,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일을 꾸준히 이어가고 싶어요. 요즘 들어 자주 드는 생각은 연기가 하면 할수록 재미있다는 거예요. 동시에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도 들죠. 예전엔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용감한 부분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제가 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믿고, 하고 싶은 일도 여전히 많습니다.
Credit
- 패션에디터 손다예
- 피처에디터 전혜진
- 사진가 최문혁
- 스타일리스트 박경은
- 헤어 스타일리스트 이선영
-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미영
- 네일 아티스트 최지숙
- 세트 스타일리스트 김민선
- 아트 디자이너 강연수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 어시스턴트 임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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