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소리가 '폭싹 속았수다'에서 깊고 길게 경험한 것
모든 말과 재단들을 건너 지금 문소리가 도달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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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좋아하세요? 유튜브 촬영 때 소개한 파우치가 테이트 모던에서 판매하는 여성 아티스트 그룹 ‘게릴라 걸스’의 굿즈더라고요
영국영화협회(BFI) 초청으로 남편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상영 토크가 지난해 런던에서 열려 함께 갔거든요. 사실 테이트 모던보다 다른 곳이 더 좋았어요. 내셔널 갤러리에서 흰 코트를 입은 주디 덴치의 아주 근사한 초상을 만났죠. 예전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서 본 피오나 쇼 초상화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흰색 브라에 스커트를 입고 앉은 모습을 그린 그림이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다 멋진 배우들의 초상화군요
눈앞의 이미지로 캐릭터를 직관적으로 해석하고, 포즈나 표정을 통해 서사를 짐작하는 일이 재미있어요. 연기도 그런 연기가 좋잖아요. 찰나의 장면인데 그 인물 자체가 보이는 듯한 연기.
문소리 또한 평소에는 이미지로서 해석당하는 입장일 것 같긴 합니다만
그렇겠죠?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잘 모르면서 너무 함부로 판단하는 게 서운하던 시절도 있었어요. 요즘은 ‘그때 내가 그렇게 보였나 보다. 그것도 내 일부인가 보다’ 하고 받아들여요. 판단이라는 건 원래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같기도 해요. 어떻게 일일이 다 알아보고 하겠어요(웃음)? 그냥 하는 거지.
올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이하 <폭싹>)가 정말 뜨거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배우로서 힘이 되는 경험이겠지요
제 예상보다 더 많은 사람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울어줬어요. 결과는 그 작품의 운명일 뿐 내게 남는 건 작품을 하며 맺은 인연과 시간이라고 늘 생각하는데, <폭싹>은 제가 가장 여러 번 보는 출연작이 될 것 같긴 해요. 딸이 대학 갈 즈음이나 결혼한다고 할 때, 우리 엄마가 생각날 때, 아니면 남편과 나이 들어 둘이서 “여보, 우리 <폭싹> 한번 볼까요?” 할지도요.
도동리 최초의 여성 어촌계장에 도전하는 30대부터 결국 자기 이름이 적힌 시집을 소중하게 품은 70대 모습까지. 애순이라는 한 인물의 일생을 이토록 깊고 길게 경험하는 일은 어땠나요
노역이라는 게 정말 쉽지 않죠. 심지어 서서히 노인이 된 걸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극 맨 처음부터 노인으로 등장하니까요. 맨날 요양원 유튜브 찾아보고 어떻게 하나 고민을 계속하니까 우리 민옥 씨(엄지원)가 딱 그러더라고요. “언니, 그냥 해! 사람 그렇게 안 변해. 늙어도 애순이가 그냥 애순이지 뭘.” 걔는 그렇게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말을 할 때가 있어요. 물론 그 뒤에도 계속 갈팡질팡 고민하긴 했지만(웃음). 그런데 바닷가에 서서 바람 맞는 첫 장면에서 제가 “엄마” 하는데 같이 보던 남편이 말하더군요. “여보, 시작하자마자 눈물 날 것 같아요”라고.

톱은 Kate.
그나저나 자연스럽게 장준환 감독 이야기를 많이 하시네요. 두 분을 가리켜 ‘현실판 애순 · 관식’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가 봅니다
같이 산 지 19년이 다 돼가요. “우리가 꽤 사이좋은 편이구나”라는 이야기를 이제는 우리끼리도 하죠. 사람도, 관계도 계속 변하잖아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다가도 사람이 바뀌면 또 그 모습을 수용하고 존중한다는 게 정말 쉽지 않아요. 돌아보면 결혼은 정말 ‘복불복’이고, 되게 용감한 일이에요. 잘 맞아서 다행이지 안 맞았으면 어쩔 뻔했어요.
좀 복잡해졌겠죠. 이것저것(웃음)
그리고 살아보니까 우리가 다정함은 넘쳐도 괜찮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잘 몰랐어요. 다정이 주는 힘이 있다는 걸.
분장으로 나이 든 내 모습을 보는 게 배우들에게 썩 즐거운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짐작도 해봅니다. 문소리도 나이 드는 게 싫고 두려웠던 시기가 있었나요
저는 출산 후 내 몸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갑자기 이렇게 늙어서 어떡하지? 큰일났다’ 싶었는데 나중에 그때 사진을 보니 어리기만 하더라고요. 꽃도 나무도 실제 생명이 있는 것들은 다 변하며 죽기 마련이고, 그래서 갖는 힘과 그때의 아름다움이 있는 건데 당시엔 내가 그걸 몰랐던 게 후회스럽죠. 자연스러움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해요. 현대 사회에서, 특히 이 일을 하면서 쉽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 마음의 가치는 거기에 두려 합니다.

톱과 팬츠는 모두Sportmax. 슈즈는 Jimmy Choo.
<폭싹>의 세상은 현실적인 것 같지만 사실 예쁩니다. 많은 갈등이 융화되죠. 생계와 경제권을 쥔 여자들을 비롯해 풍성하게 그려진 여성들의 이야기가 일종의 모계 사회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사실 애순이와 관식이의 사랑 이야기만 그릴 거면 이렇게 이야기가 길지 않아도 돼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이 변하고 깨닫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이 수많은 등장인물을 통해 표현되는 지점이 참 좋더라고요. 우리 며느리 현숙(이수경)이가 아버지 상길(최대훈)이 사실은 ‘쫄보’라는 걸 알게 되고, 우리 시어머니 계옥(오민애)이 나에게 사과하는 것. 우리도 살면서 철들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되겠지, 그런 순간이 다 오겠지 싶어요.
한편 중년 여배우에게 ‘어머니’ 역할은 양가적 감정을 갖게 할 것 같기도 해요. 앞으로 역할이 엄마, 아줌마에 한정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배우에게도, 배우를 응원하는 사람들에게도 있지 않을지요
전 늘 그런 우려를 깨면서 이 길을 걸어왔어요. 데뷔작 <오아시스>(2002) 때도 그런 역을 하면 앞으로 배우 못 한다고 했고, <바람난 가족>(2003) 때는 이제 벗는 작품만 들어올 거라고 했죠. 30대 초반에 <효자동 이발사>(2004), <사랑해 말순씨>(2005)로 엄마 역할을 할 때도 다들 걱정했고요. 그런데 배우는 원래 이것저것 하는 거잖아요. 작품이 가진 힘이 더 중요하죠. 그래도 내가 그동안 해둔 것들이 있는데,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지는 않으려고요.

플리츠 드레스는 Sportmax. 롱 슬리브 장갑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정년이>와 <폭싹>의 어머니 사이 <지옥 시즌2>의 정무수석 이수경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제일 다양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역할이 앞으로 좀 좁아진다 해도 불평불만할 처지도 못 돼요. 설경구 선배도 그러거든요. “너처럼 연극과 드라마, 독립영화, 상업영화 다 오가는 사람 정말 없다. 거기에 결혼하고 아이도 있는데, 여전히 이렇게 할 수 있는 배우인 건 축복받은 것 아니냐”고.
‘썰물 가면 밀물 오듯’이라고 극에서 표현됐고 새 생명들이 찾아오지만 사실 나이 들수록 난 자리를 더 많이 느끼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상실은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사람이 태어나면 당연히 죽는 건데, 그 당연한 일을 받아들이기 참 어렵죠. 다만 보이지 않는데 같이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할 때는 종종 있어요. 좀 이상하게 들릴까 싶은데, 특히 극장에서 공연할 때 객석에 누군가 언뜻 보이는 것 같은 순간이 있거든요. 문득 누가 떠오르는데 바람이 부드럽게 지나가면 지금 왔다 갔나 그런 생각도 해요. 다 내가 위로받으려고 하는 일일 수도 있지만요.

보디수트는 Max Mara. 플라워 재킷은 Son JungWan. 슈즈는 Jimmy Choo.
애순과 관식은 어릴 때 꿨던 작은 꿈은 이루지 못합니다. 강아지 뽀삐를 키우고, 집에 피아노를 두고, 지프 차를 타고 미국에 가자는… 엄청나지도 않은데 결국 못 이룬 꿈들이 마지막 장면에 등장해요.
하지만 더 많은 걸 얻었죠. 막내 동명이를 잃었지만 손자와 손녀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사랑…. 그 나이까지 그렇게 살 수 있는 것 자체가 참 잘 산 거 아닌가요? 어릴 때는 다들 이런저런 꿈을 꾸지만, 그게 다 이뤄지지 않아도 삶은 괜찮을 수 있어요. 어쩌면 꿈꿀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할지도요.
지금 와서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면 참 별것 없긴 하더군요
3년 단위로 나온 다이어리가 있더라고요. 그걸 작년에 사서 잘 쓰는 중인데, 앞부분에 버킷 리스트 같은 걸 쓰는 곳이 있길래 저도 그냥 생각나는 것, 꿈꿀 수 있는 것 다 썼거든요? 그런데 문득 보니 그중에 벌써 이룬 것들이 있어요. 딸과 공연을 보고 싶었는데, 애가 어느덧 중학교 2학년이 되니까 15세 관람가 공연도 같이 볼 수 있게 된 거예요.
아이와의 관계를 통해 또 나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있겠습니다
아이는 늘 내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일깨워주는 존재죠. 내가 얼마나 인내심이 부족한지, 얼마나 어른스럽지 못한지를(웃음). 그리고 또 알려줬죠. 살면서 사랑이 얼마나 큰 가치인지.

드레스는 Bottega Veneta.
문소리의 40대는 어땠나요
제가 올해로 ‘찐’ 오십이 됐어요. 20세, 30세가 되는 건 중요한 일이고 50세가 되는 건 슬픈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40대는 좀 여유로울 거라 생각한 건 완전히 오산이었어요. 내가 무슨 공부를 하고 어떤 일을 할지, 누굴 사귈지 정도만 신경 쓰면 됐던 20~30대와 달리 40대는 내가 책임져야 할 게 참 많더라고요. 챙기고 신경 쓸 건 많은데 또 투정 부릴 데는 없고요.
그렇게 열심히 달려온 지금의 나에게 ‘장하다’고 말해 준다면
와, 이 질문이 너무 답하기 어려운 게… 돌이켜보니 다 내가 한 게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심지어 애 낳은 것조차. 저는 30대 중반에 유산하고 아이를 포기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아이가 저를 찾아왔어요. 힘들게 낳긴 했지만, 내가 노력한 건 아닌 거죠. 전에는 누가 나한테 배우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혼자 열심히 알아보고 용감하게 오디션을 본 게 제법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 이창동 감독님이 잘하신 거예요. 인연과 도움이 나를 이끌어준 거죠. 저는 결혼도 안 하려고 했어요. 그 사람이 하자고 해서 했는데, 같이 사는 게 참 괜찮아요. 애순이도 그 삶을 다 살아낸 게 장하긴 하지만, 혼자 해낸 건 아니잖아요. 해녀 이모들이랑 슈퍼집 어르신 같은 주변 사람들이 살려낸 거지. 그런데 전 애순이에 비하면 힘든 일이 있기나 했나요? 그냥 오늘 잘한 것만 있어요. 알람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난 것. 그리고 요가 다녀온 것. 그건 뭐 잘하긴 했으니까.
오늘 촬영도 참 잘하셨고요
정말 ‘장하다’고 할만한 게 없어요. 그래도 이런 하루하루가 쌓이면 죽기 전에 ‘잘 살았네’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길 바랄 뿐이죠.
Credit
- 에디터 이마루
- 사진가 김선혜
- 패션스타일리스트 구원서
- 헤어스타일리스트 우빈
- 메이크업아티스트 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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