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나의 반려닭에는 이름이 있다

유다님 작가의 반려닭에게는 제각각 예쁜 이름이 있다. 그 '존재'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

프로필 by 전혜진 2024.06.09
귀농 후 첫 봄, 병아리 세 마리가 우리에게 왔다. 자급자족 농사라는 목표를 안고 시골집을 구해 귀농한 나와 짝꿍은 꿈에도 몰랐다. 닭을 가족으로 들이게 되리라고는. 마루 위의 커다란 고무 대야에 따뜻한 물그릇을 수건으로 감싸 넣어주면 그 온기에 기대 옹기종기 붙어 자던 병아리들이 온 마당과 대나무 숲을 휘젓고 다니게 될 때까지, 우리는 닭들과 함께하는 삶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리고 닭들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처음 함께했던 쑥이, 냉이, 돌이, 그사이 입양된 잎싹이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쑥이, 참이, 방이, 복숭이, 복분이, 나리, 오동이, 가가 남았고 얼마 전에는 병아리 세 마리가 태어났다. 들풀처럼 너른 숲 여기저기 자유롭게 뛰놀았으면 하는 마음에 들풀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그렇게 우리는 각각의 존재들과 교감하며 점점 대가족이 돼가고 있었다.

닭들은 저마다 다른 얼굴과 성격을 지녔다. 쑥이는 우리와 가장 친한 닭이다. 암탉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는데 쑥이만큼은 종종 ‘꼬꼬’ 소리를 내며 다가와 말을 건넨다. 눈을 가득 메운 눈동자 덕에 얼굴도 오목조목 예쁘다. 냉이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한쪽 발등이 굽어 발이 굽은 채 걸어 다닌다. 그래서인지 예민한 편인데, 가까이 다가가면 발등을 세게 꼬집고 달아나기 일쑤다. 그러다 품에 안고 귀를 스르륵 만져주면 그제야 긴장을 풀고 몸을 맡긴다. 나리는 괜히 ‘날아오르라’는 의미의 이름을 붙인 것 같다. 밭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둘러놓은 2m 높이의 철망 위로 날아올라 닭장을 탈출한다. 2년 전 함께했던 잎싹이는 혼자 마당 밖으로 나가 모험하고 돌아오는 걸 좋아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이름이 그 개체의 개성을 만드는 것 같다.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의 주인공 잎싹이가 공장식 축산에서 탈출을 감행하고 바깥세상을 모험한 것처럼 말이다. 방이는 ‘신사 수탉’이다. 부드럽고 화려한 털에 초롱초롱 예쁜 눈, 늘 깔끔하고 멋들어진 벼슬, 우아한 걸음걸이까지 고유의 향을 뽐내는 풀 방아와 닮았다. 어느 닭은 유독 먹을 것을 탐하고, 어느 닭은 꾸준히 알을 품고 싶어 한다. 이렇게 모든 닭의 개성은 제각각이다.

목욕을 시키고 집 안에 들여 함께 잠자진 않아도 닭들은 어느새 소중한 가족이 됐다. 하지만 여타 반려동물과 달리 닭은 사람에게 의존적이지 않다. 매일 아침 현미싸래기나 쌀겨와 같은 밥과 풀, 물을 챙겨주지만 그 외에는 대나무 숲을 돌아다니며 각종 씨앗과 풀, 벌레를 쪼아 먹는다. 셋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옆집으로 넘어가 놀기도 하고, 대나무 숲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해 질 녘에 내려오기도 한다. 비가 세차게 내릴 때면 4m 정도의 감나무 아래 서서 비를 피하며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다 출출해지면 괜스레 집 앞을 서성인다.

현대의 산업화된 닭 공장은 모든 닭을 발 디딜 틈 없는 좁은 공간에 가둬놓고 사육한다. ‘자본’이라는 시스템 아래 생명의 온기는 가려져 있다. 영화 <미나리>에서 나오듯 산란 업계에서 알을 낳지 않는 수평아리들은 감별사를 통해 걸러진다. 그리고 쓸모없다는 이유로 날카로운 톱날에 갈려 죽는다. 고기용 육계로 걸러진 병아리들은 크기 전부터 빠르게 성장하도록 유도돼 몸만 비대해진 채 삐약삐약 소리를 내다 생을 마감한다. 다가오는 복날엔 또 어떤 존재들이 식탁에 오를까?

과거 동물권운동의 일환으로 도계장에 방문해 진실을 목격하는 ‘비질(Vigil)’ 활동에 참여한 적 있다. 커다란 트럭 뒤편 철망에 빼곡히 갇혀 삐약삐약 울어대는 병아리들을 봤다. 그리고 도계장 앞엔 ‘간절하지 않은 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우리 닭들만큼은 그런 현실에서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야생 새들처럼 온전히 자유롭거나 생크추어리처럼 완벽하진 않지만, 할 수 있는 한 닭들의 필요조건을 맞춰주기 위해 노력했다. 겨울에는 볏짚을 엮어 닭장 둘레를 쳐주고, 밭에서 기른 신선한 채소를 챙겨주었다. 밭에서 풀을 매다 보면 수많은 고민에 휩싸인다. 이 풀을 닭에게 줄지, 밭에 ‘멀칭(Mulching; 농작물을 재배할 때 경지 토양의 표면을 덮어주는 일)’을 할지. 그러다 굼벵이라도 나오면 도망가기 전에 얼른 닭에게 갖다 줘야 한다. 그럼 맛있는 굼벵이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이 시작된다. 기다란 지네라도 주면 서로 양쪽을 물고 당기기도 한다.

시골살이 4년 차, 땅을 살리는 농사를 지으며 수없이 개구리와 달팽이 · 지렁이와 만나고, 소중한 닭이 멸종위기 동물 담비에게 잡아먹히기도 하고, 깜깜한 시골길에서 사나운 들개와 마주칠까 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 차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논길에서 죽은 올챙이 떼를 목격하고, 밭에 움푹 팬 멧돼지의 목욕 흔적을 밟고 지나가기도, 갈수록 극심해지는 기상 이변에 각종 벌레와도 씨름하는 동안 야생에서 인간의 위치와 먹는 행위에 관한 가치관은 꾸준히 변해왔다. 그럼에도 공장식 축산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자본주의에서 닭들은 고유의 특성과 개별성을 무시당한 채 그저 알을 낳는 기계로 인식된다. 도시에서 닭은 고기를 지칭하는 언어가 돼버렸다. 아침에 해가 밝아오면 닭장 문을 열어달라고 떼를 쓰고, 어둑해지면 몸을 보호하기 위해 횃대에 올라가 일렬로 서서 잠을 청하고, 맛있는 걸 발견하면 ‘꼬꼬꼬’ 노래를 불러 암탉에게 먼저 먹이는 수탉의 배려심과 병아리들을 품고 있을 때 다가가면 털을 곤두세우며 예민해지는 암탉의 모성애를 보고 있으면 닭들의 기본적인 욕망은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반려닭과 함께 산다는 것은 수많은 질문과 편견을 마주하는 일이다. 닭을 키운다고 하면 들려오는 단골 질문이 있다. “알 낳아요?” 사람들에게 닭을 키우는 일은 알이 목적인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간헐적으로 알을 먹는다. 나와 짝꿍은 귀농 전 서울에서 동물권운동을 하며 ‘완전 채식(Vegan)’을 실천했다. 그렇기에 처음 닭을 집에 들였을 때 많은 고민을 했다. ‘암탉이 알을 낳으면 어떻게 하지?’ ‘뒷마당에 산을 끼고 있어 야생동물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냥 마당에 풀어둬도 될까?’ 많은 고민 끝에 우리는 마트에 가기 위해 차를 타고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두부에 의존하느니 비교적 너른 공간에서 행복하게 자란 닭들의 알을 먹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쌀겨와 묵은쌀, 깻묵, 칼슘, 막걸리 등을 배합해 발효시켜 만든 밥을 매일 닭들에게 챙겨주기에 이런 방식으로 공존관계를 만들어가기로 타협한 것이다. 비록 닭들의 동의 여부는 미지수지만.

한편으로 암탉에게 알을 깨주기도 한다. 우리가 그런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꺼림칙해한다. 그런데 그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 보통 1년에 한 번 둥지를 틀고 보통 6개 정도의 알을 낳던 과거 야생 닭이 현대에 와서 거의 매일 알을 낳도록 개량됐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20세기 초에 이런저런 흥미로운 모양새로 개량한 탓에 품종별로 갖은 질병을 달고 사는 품종견과 비슷한 경우인 셈이다. 여성이 한 달에 한 번 생리를 하듯 암탉은 매일 몸의 일부를 몸 밖으로 내보내기 때문에 수명이 점점 단축된다. 몸에서 빠져나간 만큼 영양 보충이 필요한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알은 훌륭한 영양 공급원이다. 신기하게도 닭은 본인이 필요한 만큼만 먹는다. 알을 깨줘도 어느 날은 허겁지겁 먹지만, 먹을 것을 충분히 먹은 날은 본체만체한다. 이런 점은 사람보다 낫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는 남이 농사짓고 요리해 준, 가공된 음식만 편하게 먹고 살지만 각종 화학성분으로 뒤범벅된 요리 재료들은 몸의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무엇이 내 몸에 좋고 나쁜지 아는 것조차 어렵다. 그에 반해 닭은 본능적으로 먹이를 사냥하고, 눈앞에 약초와 독초가 있으면 가려 먹을 줄 알며, 충분히 먹었으면 멈출 줄도 안다. 그래서 닭들은 우리의 스승이기도 하다. ‘닭대가리’라 칭하며 닭들이 무지하다는 인식과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는 사고는 닭이란 존재를 잘 몰라서 생겼을지도 모른다.

나와 짝꿍에게는 700평 정도의 감밭이 있다. 감밭 한편엔 커다란 둠벙(개울)이 있어 다양한 수생식물이 자라고 개구리와 올챙이, 도롱뇽이 살며 새들이 왔다 간다. 감나무뿐 아니라 수많은 야생 풀이 어우러져 있다. 이곳에 어린 묘목과 다년생 작물을 심었다. 미래엔 어떤 숲으로 변모해 있을지 몹시 기대가 된다. 이곳에 우리 닭들을 풀어 키우는 것이 꿈이다. 닭들은 너른 숲을 돌아다니며 풀과 벌레, 씨앗을 먹고 마음껏 흙을 파헤치고 마음껏 목욕하며 동식물과 공존해 갈 것이다. 닭들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야생동물의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닭들의 행복을 찾아주되 야생에 굴복할 것이냐, 아니면 닭들의 행복을 제한하되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냐. 우리가 자연 속에서 닭들과 살아가며 풀어가야 할 가장 큰 난제다. 그럼에도 그저 사는 동안은 제 욕심껏, 제 소명껏 살다가 편안히 가길 바랄 뿐이다. 아름답고 소소하게 피고 지는 들꽃들처럼.


유다님

생태· 비거니즘 주제의 책을 만드는 1인 출판사 ‘베지쑥쑥’ 대표이자 반려닭과 함께 사는 삶을 전하는 사람. 공장식 축산업과 육식 문화를 주제로 한 단편 다큐멘터리 <여름>을 연출했다. 현재 생태적 자립을 위해 귀농했으며, 전남 곡성에서 거주 중이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글 유다님
  • 일러스트레이터 KAY MCDONAGH
  • 아트 디자이너 구판서
  • 디지털 디자이너 김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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