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사라진 핑크머니를 찾습니다
모르는 사이 여성들의 지갑을 잠식해 버린 핑크 택스. 그 앞에서 우리가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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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 제품이라도 여성이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현상을 뜻하는 ‘핑크 택스(Pink Tax)’는 지난 2015년 뉴욕에서 처음 대두한 용어다. 뉴욕 시 소비자보호원이 24개 온오프라인 소매점에서 판매되는 800여 개 제품의 남녀용 가격 차이를 조사한 결과 샴푸나 컨디셔너, 데오도란트, 면도기 등 여성용 가격이 더 높게 책정된 제품이 42%를 차지하며 ‘성차별 가격’이 세상에 드러났다. ‘핑크’라는 표현도 당시 제조사들이 ‘핑크색으로 만들기만 해도 여성들이 더 많은 돈을 쓸 것’으로 예상하는 말을 비꼰 것이다. 국내에서 이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한 건 2018년. ‘핑크 택스를 아십니까?’라는 청원 글로 헤어 커트 가격 차이에 대해 문제 삼는 흐름이 비로소 시작됐지만, 6년 후인 지금 현실은 그대로다. 지난달 한국소비자원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서울 지역 여성 커트 1회 평균 가격은 2만1308원으로, 남성 가격인 1만1692원에 비해 약 두 배 비싼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 다룬 기사 댓글 반응은 첨예하게 갈렸다. ‘기장도 다르고, 여자들의 요구사항도 유별나니 그렇지’와 같은 글이 대부분. 쇼트커트한 여성이 태반인 이때에 머리 길이로 남녀를 뭉뚱그리는 통념도 와닿지 않지만, 그 논리대로라면 기장에 따라 가격을 달리 받는 것이 맞지 않나? 일상에서 핑크 택스가 부과되는 경우는 쉽게 맞닥뜨릴 수 있다. 최근 한 커뮤니티에는 헬스장에서 발생하는 핑크 택스 이슈가 화두였다. 남성들은 중량 증가를 최대 목적으로 하며, 그에 부합한 방식으로 코칭받지 않으면 운동 방식을 지적하거나 환불을 요구하는 존재인 반면, 여성들은 힙업이나 뱃살 빼기 등 일부 부위만 공략하는 얕은 운동법만 알려달라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트레이너 측에서는 같은 가격에 차등 트레이닝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 남성들에게는 PT 수업이 아니라면 배우기 힘든 중량 운동 자세, 데드리프트 자세 등 프리웨이트나 머신 운동 위주로 가르쳐주지만 여성들에게는 뒷발차기나 맨몸 스쿼트 같은 동작만 반복하게 한다는 불만이었다. 이에 나는 또 자문했다. 그럼 힙업을 원하는 나는 잘못된 것일까?
이 ‘여성의 용어’가 세상 밖으로 나온 지는 꽤 됐지만, 생각보다 돈을 더 내고 있는 당사자인 여성들 대부분이 이를 당연히 여기고 소비에 별다른 의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러니하다. 사실상 핑크 택스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남녀 중 누가 돈을 더 내는가, 혹은 경제적 수요와 공급 논리로 따지기 전 아주 오랜 기간 여성들에게 내재화된 꾸밈 요구와 성차별적 편견에 관한 아주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양상으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인데 말이다. 자각하더라도 시장 논리와 개개인의 욕구 그리고 ‘차별’ 사이의 모호함에 길을 헤맨다. 하지만 대부분 핑크 택스로 느껴진다는 사례는 ‘꾸밈 노동’과 확실하게 관련이 있고, 아름다움과 치장의 문제 같은 외적 및 성차별적 기준에 맞춰져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핑크 택스의 개념은 나날이 확장돼 현재는 여성 위주로 ‘타기팅’하는 상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싼 경우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중 부동산 이슈가 단연 화두다. 최근 부동산 정보 플랫폼 ‘다방’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 주요 10개 대학 원룸(전용면적 33㎡ 이하)의 월세는 여성들이 주로 밀집한 이화여대가 지난 1월 기준 71만 원으로 가장 비쌌다. CCTV나 방범창 등 여성들을 위한 안전 시설이 구비돼 있기에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시설이 대단히 특별한 경우는 별로 없다. 그저 ‘여성 전용’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주 거주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격을 올려받는 상술에 불과한 경우도 대부분이다. 기호나 취미의 영역을 넘어 불안과 공포, 안전 욕구를 기반으로 한 ‘택스’까지 내야 한다니 속수무책이다. 물론 남녀가 내는 가격 차를 기준으로 핑크 택스를 규정하기에는 오류가 있다. 이 문제는 보다 여러 관점에서 논의돼야 한다. 수요와 공급의 논리로 해석할 수도 있다. 특정 그룹에서 수요가 높으면 가격을 높여도 팔리는 게 시장이니까. 또 가격과 디자인은 규제 대상이 아닌 것도 물론이다. 그러나 소비자는 힘이 없다. 구매하거나 혹은 구매하지 않은 선택지만 주어질 뿐. 이 문제를 보다 혼란 없이 들여다보고 마땅히 힘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법안으로 이를 규제하기에는 이 문제를 둘러싼 수치를 측정할 자료가 부족하고, 정확한 실태 조사 또한 여러 요건으로 선행되지 못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런 상태라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 10~20대 여성들이 부딪히는 소비 문제에 주목해 온 <페미니즘 리포트>의 저자 김아영 또한 “성별 차이를 분석하는 건 굉장히 어렵다. 단순히 남녀가 사용하는 가격만으로 비교해서 핑크 택스라고 단정해 버리면 초기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최근 굉장히 거세진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논의를 구체화하려는 노력에 주목해 볼까? 최근 중국에서 대학생 J 씨는 로레알 사의 남성용 클렌저 제품 가격이 82위안인 데 비해 여성용은 149위안으로 거의 2배 차이가 나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제품 용량은 물론 성분과 효능, 함량이 동일했기 때문이다. 법대생인 그는 친구들과 팀을 꾸려 “로레알이 법에 따른 공정한 거래를 보장하지 않는다”며 법원에 제품 전액 환불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커진 여론에 로레알은 전액 환불을 약속하고 소송은 합의로 끝났지만, 핑크 택스에 대한 인식이 현저히 낮던 중국 내 여성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사례다. 2021년 뉴욕에서는 꾸준한 발의로 용도나 기능적 디자인에서 차이가 없는 제품을 여성용이라는 이유로 가격을 다르게 부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시행했다. 또 신체 구조상 반드시 써야만 하는 생리대, 탐폰 등을 기호품으로 분류, 과세하는 것에 반대 논의가 활발해지자, 일부 국가는 여성용품에 부과된 세금을 인하했다. 2015년 캐나다는 위생 패드와 탐폰에 붙던 5%의 세금을 폐지했고, 미국은 10개 주에서 여성용품에 붙는 6.85%의 세금을 없앴다. 현재 우리나라는 여성용품에 과세하지 않지만, 생리대 평균 가격은 개당 331원으로 OECD 국가 평균 가격의 두 배 정도다. 그럼에도 핑크 택스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의 참여율은 현저히 낮고, 기업 재무제표의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기 위해 정해진 날짜에 맞춰 여성들이 함께 소비를 중단하는 ‘여성소비총파업’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가장 오래된 핑크 택스 이슈인 헤어 커트와 관련해 ‘핑크 택스 프리’ 미용실을 찾아주는 인스타그램 계정 또한 운영은 멈춘 지 오래다.
로레알에 소송을 건 대학생 J 씨는 한국의 한 언론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그래왔다’며 핑크 택스가 존재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소비자가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도록 영감을 주고, 핑크 택스에 함께 저항하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김아영 작가 또한 “핑크 택스는 페미니즘으로 국한할 문제가 아니다. 내 삶을 얼마나 주체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젠더 감수성’은 반드시 여성이라고 더 높지 않다. 문제는 어떤 가치관에 더 많이 노출되고 익숙해져 있느냐 하는 것이라며 이 개념의 경제적 타당성에 앞서 여성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벌어지는 일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당연한 것에 의심하는 자세 말이다. 꾸준히 핑크 택스에 목소리를 내온 <프리랜서지만 잘 먹고 잘 삽니다>의 저자 도란의 말에서 해답을 찾아보자. “첫 단계는 우리가 차별적 소비에 얼마나 동참하고 있는지 깨닫는 것이다. 미용실에서 비싼 값으로 머리를 자르는 데 의문이 들지 않는 당연함, 재료와 공임에 차이가 없음에도 여성용이란 이유로 더 많은 액수를 지불하는 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안일함과 거리를 둬야 한다. 모든 성이 평등한 게 당연하듯 소비문화도 평등해야 한다. 망설임 없이 지갑을 여는 대신 너무나 익숙해 알아차리지 못했던 성차별 가격에 의문을 갖고 솔직한 감상을 밝히는 것은 차별적 소비의 구습을 끊어내고 성중립 가격을 획득할 수 있는 첫걸음이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일러스트레이터 나승준
- 아트 디자이너 김려은
- 디지털 디자이너 이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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