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릴 만한 옷으로 변신시켜라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런웨이에 등장한 아름다운 ‘작품’들을 보며 감탄하다가 문득 드는 의문 한 가지. ‘근데 잠깐, 저걸 어떻게 입지?’ 입기엔 난해하고 포기하긴 아깝다고 외치는 일반인들을 위해 디자이너들이 준비한 것, 그것을 우리는 ‘커머셜 피스’라 부른다. :: 패션,런웨이,아름다운,화려한,예술적인,엘르,엣진,elle.co.kr :: | :: 패션,런웨이,아름다운,화려한,예술적인

‘패션 에디터’란 이름표. 그 다섯 글자가 사람을 얼마나 간사하게 만드는지. 매 시즌 바다 건너로 날아가 패션쇼를 지켜볼 때면 두 개의 마음이 번갈아 등장해 싸우곤 한다. “저런 평범한 옷을 대체 런웨이에 왜 올리는 거야?” 혹은 “도대체 저 옷을 어떻게 입으라는 거야?” 당장이라도 거리에 입고 나갈 수 있을 만한 웨어러블한 옷을 보면 전자의 외침을, 기기묘묘하고 일명 ‘아티스틱’한 옷을 봤을 땐 후자의 볼멘소리를 내는 것이다. 몇 개월 동안 창작의 고통을 떠안고 옷을 준비한 디자이너들이 이 글을 본다면 아마도 억울해하며 이렇게 소리치겠지. “야! 그럼 도대체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 가슴에 트임이 있는 드레스는 코튼 티셔츠와 스커트로 변신했다.제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예술 작품에 그치는 난해한 의상은 사람의 몸에 걸쳐질 수 없으니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또한 당장 입을 수 있는 웨어러블한 옷은 런웨이에 세우기엔 의 윤성호 말마따나 ‘임팩트’가 없으니 그 역시 반쪽짜리다. 그렇다면 이거야말로 난제 중의 난제요, 딜레마 중의 딜레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가장 영리한 선택은 무엇일까. 상업성 따위 모른 척하고(완벽하게 모른 척하기 어렵다면, 제발 절반만이라도) 일단 아름다운 쇼 피스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의 ‘쏘울’, 즉 디자인의 중심이 되는 영혼을 오롯이 담은 커머셜 라인을 만드는 것.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길일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용어부터 정리하고 넘어가자. 커머셜 라인이란 쇼에서 선보인 ‘작품’을 소비자들이 입을 만한 형태로 재창조한 ‘옷’이다. 쇼 피스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되 착용에 불필요한 요소들은 정리하는 것, 그것이 커머셜 라인 디자인의 핵심이다. 과도하게 화려한 장식은 빼거나 줄이고, 입고 돌아다니기 어려울 만큼 지나친 트임 장식은 막고, 과장된 실루엣은 정리하고, 소재는 좀 더 보편적이고 관리하기 수월한 것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지난가을, 청담동 G백화점 D&G 매장에 들렀을 때 받았던 충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2009 F/W 컬렉션에 등장한 의상들은 오페라 극장에나 등장할 만한 꽤 화려하고 장식적인 옷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매장에 진열돼 있는 것은 누구나 입을 수 있는 평범한 실루엣의 재킷이 아닌가! 고전적인 문양은 살리되 코르셋은 과감하게 빼고 소재는 벨벳이 아닌 모직물로 바꾼 것이었다. 해외 컬렉션 취재를 가면 간혹 브랜드의 본사 사무실에 들러 쇼룸을 둘러보곤 하는데, 그때도 이처럼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런웨이에서 행진하던 옷들이 무대에서 퇴장한 후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게 되는 것이다. 현실 세계로 내려와 행거에 걸리는 순간 발렌시아가의 미래적이고 전사적인 옷은 한결 부드러워져 몸에 착 감기고, 드리스 반 노튼의 화려한 프린트는 심플하게 정리되고, 프라다의 과감한 트임은 입을 다문다. 스커트의 화려한 비즈장식을 정돈해 입고 관리하기 편리하게 했다.MISSION 1 팔릴 만한 옷으로 변신시켜라!이번 시즌 컬렉션에 등장한 옷들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쳐 새롭게 태어났다. 어떤 모습으로 변신해 사람들의 몸에 입혀질지 가장 궁금했던 건 바로 알렉산더 맥퀸의 쇼피스였다. 쇼를 볼 때는 두 손을 맞대고 마구 환호했지만, 막상 ‘아니지, 저건 갤러리에 걸릴 작품이 아니야. 사람 몸에 입혀져야 하는 옷이라고!’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심해에 사는 생명체 같기도 하고 외계인의 피부 결 같기도 한 독특한 프린트, 그리고 괴물의 발을 덧씌운 것 같은 30cm 높이의 킬힐. 맥퀸은 이 기묘한 옷을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프린트에 집중했다. 독특한 무늬는 그대로 살리고 소매와 치마의 볼륨감은 과감하게 줄였다. V 네크라인으로 변경하고 가슴 부분에 자연스러운 드레이핑 장식을 더해 여성스러운 느낌을 살렸다. 이것도 여전히 무시무시하다고 느끼는 이들을 위해 한 단계 더 순화된 옷도 있다. 기존 프린트에서 가장 중요한 라인(배꼽으로 모아지는 허리선)만 살린 블랙 컬러 미니드레스가 그것이다. 레이 가와쿠보 역시 언제나 ‘저걸 어떻게 입지?’라는 의문이 드는 옷을 만드는 이 중 하나. 그녀가 선보인 이번 S/S 시즌 꼼 데 가르송 컬렉션의 키 패턴은 도트 프린트였다. 이 ‘땡땡이’ 무늬는 현실 세계에서 쫀쫀한 버뮤다 팬츠가 아닌 H라인 미니드레스 위에 안착했다. 딱 봐도 꼼 데 가르송 옷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누가 입더라도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만한 실루엣이니, 성공적인 변신이라 할 수 있다. 마감 처리되지 않은 여러 가지 소재가 마구 뒤섞인, 다소 복잡해 보이는 재킷의 경우에는 블랙 컬러의 한 가지 소재로 통일됐다. 프라다 커머셜 피스의 핵심은 심(Seam) 처리였다. 스커트의 헴라인을 정리하지 않고 그냥 두었던 쇼 의상과는 달리 커머셜 피스들은 쌈솔(같은 소재로 감싸 넘겨서 박는 심 처리 방식)로 마무리했다. 스커트 양옆의 트임 장식은 막고 등에 달려 있던 하늘하늘한 소재의 날개는 과감하게 떼냈다. 대신 허벅지 양쪽에 주머니를 달아 실용성을 높였다. 실크 소재 드레스 위에 프린트되었던 플라워 프린트와 흑백 사진은 면 소재의 화이트 티셔츠 위에 새겨졌다. 질 샌더의 경우 가슴과 옆구리, 골반, 허벅지의 각 부분에서 매듭을 지어 실루엣이 완성되는 드레스를 더 심플하게 변신시켰다. 소재는 쇼 피스와 같은 것으로 그대로 유지하되 슬리브리스 소매는 긴팔 소매로 바꾸고 매듭은 허리 윗부분에서 한 번만 묶게 바꿨다. 각종 에스닉한 프린트와 화려한 비즈 장식을 선보였던 드리스 반 노튼. 그의 찰랑거리던 무거운 비즈 장식이 커머셜 라인에서는 가벼운 시퀸으로 교체됐다. 어떤 옷에서는 무늬로만 남기기도 했는데, 무거울뿐더러 관리도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발맹의 경우 어깨에 화려한 견장과 단추가 달려 있던 밀리터리 재킷의 디테일을 심플하게 정리했다. 또한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던 티셔츠는 약간 얇고 비치는 소재로 살짝 막아 그런지한 느낌만 살렸다. 소화하기 쉽지않은 ‘쫄쫄이’ 바지는 미니드레스로 변신.MISSION 2 겉절이만 팔지 않도록 주의하라!하지만 사진에서 느껴지듯이 입을 만한 옷으로, 즉 평범하고 무난한 옷으로 바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쇼 피스가 커머셜 피스로 둔갑했을 때 룩 전체의 느낌이 너무 평범해져 애초의 디자이너 작품이 가진 특별한 어떤 부분을 아예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올리비에 데이스켄스의 마지막 컬렉션, 잔혹 동화 속 마녀 같았던 그의 아름다운 옷들이 런웨이를 떠나 매장을 향하며 얼마나 기막힌(나쁜 의미에서) 변화를 겪었는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제아무리 쇼에 미래적인 전사 룩이 나왔다 하더라도, 잡지마다 게스키에르의 천재성에 대해 떠들어대도, 한국 매장에만 들어오면 평범한 티셔츠와 청바지로 변신하는 발렌시아가는 또 어떤가. 디올의 경우 이번 시즌 커머셜 라인에서 크게 변화를 주지 않았다. 무겁거나 관리가 어려운 소재를 좀 더 웨어러블한 소재로 바꾸고 길이를 줄이기는 했지만 디자인 자체에 큰 변화는 주지 않았다고. 코르셋으로 허리를 꽉 조이는 바 재킷이나 란제리 룩도 쇼 피스 그대로 과감하게 바잉했다. 매 시즌 비슷비슷한 평범한 옷보다는 쇼 피스의 느낌을 그대로 담은 옷을 입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났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다. 결국 과감하게 쇼 피스를 내놓아 소비자들에게 디자이너의 작품을 입힐 것인가? 쇼에서 보인 것과는 별개로 잘 팔릴 만한 옷으로 판매의 물꼬를 시원하게 틀 것인가? 아니면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성공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답하기 쉽지 않은 이 거대한 질문 앞에 브랜드들은 매 시즌 다른 선택을 한다. 분명한 사실은 그 선택이 브랜드의 미래와 직접적으로 연관 있는, 아주 중요한 결정이라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4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