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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고도 살가운 ‘지성’ 씨

<엘르> 5월호에서 예고한 대로 오늘 지면에 미처 다 담지 못한 배우 지성과 워밍업 인터뷰를 공개한다. 지면의 컨셉추얼한 인터뷰가 지성의 면면을 짚어간 흔적이었다면 이 29분간의 사족은 남들에겐 관대하지만 자신에겐 엄격한 지성의 사생활에 가깝다.

BYELLE2015.05.15

브이넥 티셔츠는 Zadig & Voltaire. 팬츠, 슈즈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별도의 질문지가 있긴 하지만 오늘은 <쓰고 태워라>라는 이 책의 흐름대로 인터뷰를 해볼까 해요. 여기 나온 질문들에 대한 답을 쓰면서 자기자신과 함께 진실게임을 해보는 책이거든요. 우린 말로 해야겠죠 요즘엔 생각하게 만드는 책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제가 어제(이 인터뷰는 4 10일에 진행됐어요) 읽기 시작한 게 <당신의 내면을 검색하라>라고 구글 엔지니어가 쓴 책이에요. 감독님이 권해 주셨는데 그 또한 생각하는 책이에요.

컬러링 북 해 본 적 있으세요? 요즘 완전 트렌드예요. <쓰고 태워라>가 쓰는 버전이면 컬러링 북은 색칠하는 용. 잡다한 생각을 접고 손이 하는 일에 집중하라고 권하는 책이에요 근데 왜 안타까운 기분이 들죠. 요즘 시대가. 전 제 나이답지 않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나이답게 살다 보면 어느새 연기가 공식처럼 다가올까 봐 그래요. 색칠도 그렇고 그림 그리는 것도 그렇고 전 평상시에 하는 일 중 하나예요. 그렇게 제 생각을 한 번 찾아보거든요. 어떤 계기가 되어 나를 돌아볼 순 있겠지만 평상시에 뜬금없이 나를 돌아보긴 힘들잖아요. 그래서 연습을 해봐요. 내가 안 했던 행동들을 한다든지 안 했던 일들을 해 본다든지 하면서 생각도 하는 거예요. 내가 뜬금없이 느끼는 것들을 머리 속에 체크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킬미, 힐미>도 그런 작품이었어요. ‘다중인격, 7중 인격, 일곱 가지 캐릭터가 부담되지 않았나하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전혀 부담되지 않았어요. 중요한 건 제 인생에서 한 번쯤 거느려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다는 사실이에요. 어떻게 보면 <킬미힐미>를 하게 된 목적도, 동기도 저에게 어떤 차례나 기회가 아니었나 싶어요. 요즘 죄다 휴대폰을 들여다 보고 살아가는데 뭔가 뻔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전 뻔하게 살고 싶진 않아서일단 이 책을 어떻게 시작할까요? 체크해 놓은 페이지를 볼까요?

여기 첫 번째 진실챕터부터 시작이에요. 보라색 색연필로 표시한 게 제 가이드고요. 밑줄 내용과 체크 표시한 질문에 대해 직관적으로 대답해 주시면 되요 (그가 들여다본 첫 번째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당신은 진실로부터 숨을 수 없지만, 진실이 당신으로부터 숨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술가는 거짓말을 통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중략) 진실에 대해 생각해보고 질문에 답하기 바랍니다라는 두 문장에 밑줄을 그어 놓았다) 그런 얘기들을 해요. 보통 연기는 다 구라다, 거짓말이다, 그런 척 하는 거다 라는.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거짓말이라고 일컫는 연기를 하면서 내가 아픈 이유는 뭘까요. 그럼 그게 과연 거짓말일까, 그런 척 하는 걸까, 아님 구라일까. 어떤 분들은 쉽게 슬픈 감정 신, 이런 거 많이 해봤잖아식의 주문을 해요. 전 척 하는 게 싫어서 진짜 아파야 되고, 진짜 슬퍼야 되는 부분이 좀 있어요. 그래야만 진실성을 갖추고 연기할 수 있더라고요. 안 그러면 눈부터 떨려요. 그래서 연기할 땐 저 혼자 힘들어요.

연기한 지 17년 정도 됐는데 그동안 계속 그랬나요 계속 그러려고 노력했죠. 근데 그게 잘 안 됐었기 때문에 못했을 때도 있었고 그럴 때면 사람들이 쟤는 2프로가 부족해그러기도 했죠.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나요 , 어렸을 때부터 쭉. 처음부터 잘하진 않았으니까. 어떤 감독님은 제가 신인 때 그런 얘기도 했었어요. “네가 연기자로 성공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카이스트>? 아니오. 그걸 얘기해 버리면 누군지 알잖아(웃음). 그런데 최근에 그 분께 사과의 말을 들었어요.

왠지 <뉴하트> 일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뉴하트>는 감독님과 정말 힘들게 작업하면서 만든 작품이에요.

그럼 <맛있는 청혼>? 렇죠. 그때 한 얘기와는 별개로 지난 17년간 워낙 돈독하게 지내왔고 지금도 항상 버팀목이 돼주고 격려해주는 분이기도 해요. <킬미, 힐미>도 꾸준히 모니터해주셨고 종영 후에는 제일 기뻐했고요. 시청률과 반응을 떠나 “<킬미, 힐미>는 드라마다운 드라마라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저에겐 그 말이 굉장히 의미 깊었어요. 영광이었죠. <맛있는 청혼>은 미니시리즈의 첫 작품이었어요. 그땐 정말 연기를 못했어요. 주인공 친구 역할이었는데 대사 한 줄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데뷔한 게 스물 두 살 때였나요 스물 두 세 살?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

지난 번 영화 <좋은 친구들>에서도 그렇고 지성 하면 무게 중심을 잘 잡는 배우라는 얘기를 하곤 했어요. 중심을 잡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지만 그 중력의 힘이 곧고 진지하고 선한 이미지로만 이끄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선한 건 모르겠는데 원래 진지하긴 해요(웃음). 근데 음... 무게 중심은 좋은 말이네요. 저는 아직 나는 어떤 배우인가’, ‘내가 선 지점에서 어느 정도 하고 있나’, ‘지난 작품은 어땠고 이번 작품 어땠나는 자문에 답할 준비가 안 됐어요. 아마도 제가 잡은 배우의 이상이 굉장히 높나 봐요. 그래서 누군가 제 연기에 대해서 찬사 혹은 질책을 하거나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의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해도 그건 모두 당연한 거라 생각해요.







(왼쪽)그레이 셔츠는 Zadig & Voltaire. 브라운 인형(110cm)은 Line Friends. (오른쪽)그레이 수트는 Dior Homme. 메탈 밴드의 포르토피노 크로노그래프는 IWC. 실버 브레이슬렛은 Golden dew.





블랙 티셔츠는 Zadig & Voltaire.

언제부터인가 커리어가 제법 되는 배우들을 인터뷰할 때 그래프를 그리는 버릇이 생겼어요. 필모그래피, 인기, 연기력을 더해 그래프의 평균을 내본다면 어떤 포물선이 그려질까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모양의 그래프를 그리며) 평균적으로는 이런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치고 올라간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한 계단, 한 계단 밟아왔어요. 물론 한 번에 두 계단 올라가고 싶은 욕심도 있었죠. 근데 그게 되게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런 점이 지난 17년 간 저를 힘들 게 만들기도 했고요. 제가 군대 가기 전까지 정말 기를 썼는데도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잘 안 됐어요. 연기라는 게 마음 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소위 그 당시 제 또래에 잘 나간다는 배우들을 봤을 때 나에게 부족한 점이 보이는 거예요. 서른에 군대를 갔을 때 생각했죠. 과연 내가 저들보다 나은 게 뭐가 있을까? 자신 있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10년 뒤를 보자고 생각했고 차곡차곡 커리어를 쌓아서 40대부터 시작하자 그랬어요. 딱 보니까 40대 때도 내가 1등할 순 없을 것 같고, 최고가 될 순 없을 것 같으니 40대부터 쌓아나가서 누가 더 길게 가는지 보자는 거였죠.

누가 더 높이가 아니라 누가 더 멀리였네요 그러고 나니 욕심을 버릴 수 있게 됐어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서 다양한 장르를 접했고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전했고, ‘내리막이 굉장히 씁쓸하고 외롭고 힘들겠구나하는 좋지 않은 결말도 예상하면서 그 도전을 거듭해 왔어요. 선택을 거듭해 왔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위험부담이 큰 도전이었나요 그래도 10년 뒤를 생각했으니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전 사극을 하면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성적을 기준으로 한다면 사극은 세 작품을 했는데 다 성적이 좋지 않았어요. 아쉬움이 많이 남죠. 지금도 소속사 사장님이 농담 삼아 사극 한 번 해야지?” 그러곤 해요(웃음). 사극은 나이 들어 재도전할 테니 지금은 교복을 입고 싶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어요. <킬미, 힐미> 시나리오를 받기 전 물망에 오른 배우들의 이름을 들었을 때 이거 나 시켜주면 잘 할 수 있는데그랬더니 주위에서 다들 웃더라고요. 제가 막 나 여자 교복 입을 수 있어. 열 일곱 살 될 수 있어그랬거든요. 실제 저에게 그런 감성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좀 유치하게 표현하면 저만의 순수함이나 어린 구석들을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배우는 철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이어온 소신(!)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차도현 역을 제안 받고 감독님을 만났더니 군 입대 전 마지막 작품을 같이 연출해 주셨던 분이었던 거예요.

<떨리는 가슴>이요? . 그래서 결정을 했죠. 그래프 얘기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제 인생을 그래프는 안 그리릴래요(웃음). 전 자신을 저평가해온 것 같아요. 저평가가 너무 과하면 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정도까지 가더라고요. 그러다 결혼을 계기로 제 자신을 사랑하게 됐거든요. 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내 가족을 사랑하지도 못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지금은 저평가의 긍정적인 면도 발견했어요. 나를 일으킨 힘이기도 했으니까요.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건 자신을 더 좋아할 수 있게끔 거들어주는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어른들이 그러잖아요. 애들이 잘못했을 땐 야단치고, 잘했을 땐 칭찬해 주잖아요. 인생이 그런 거라고 봐요. 내가 사는 울타리 안에서 칭찬받고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배우들의 인생은 좀 달라요. 칭찬 일색으로 사람을 띄웠다가 또 엄청나게 상처받는 얘기를 했다가이런 반복이 사실 좀 무서워요. 저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무서운 삶을 살고 싶진 않거든요. 어떻게 보면 제 인생 그래프가 하향곡선을 이루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바람 같아선 더 내려가지 말고 평행을 그엇으면 좋겠어요. 아내가 있고 아이가 있고 부모님도 살아계시고 친구도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있는 이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죠. 내가 얼마만큼 인정받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감사하죠.

필모그래피를 쭉 보니 오랫동안 주인공 역할로 일관했어요 사실 제가 캐스팅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작품이 상당수였죠. 하지만 결국 그 배역을 맡았으니 이 또한 제가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 나를 절실히 필요했을 때 감사하게 생각하고 진짜 열심히 해 왔던 것 같아요. 지난 17년간 20여 개 작품을 했는데 감독님들 성향이 하나같이 열심히 하는 걸 좋아하는 분들이셨어요.

도전과 선택에 이은 열심의 아이콘이었네요 제가 말했잖아요. 나에 대한 저평가일지 내가 가진 게 낮은 수준일진 모르겠지만 10년 후를 바라보고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고요. 그리고 40세에 출발선에 서겠다고요.

마흔이면 내년이네요 그렇죠. 근데 제가 빠른 77년생이에요.

그럼 올해네요 올해라고 생각하죠.

<킬미, 힐미>같은 작품을 만날 걸 예상했나요 못했죠.

공교롭게도? 공교롭게도.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그럼요. 적어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했던 것 같아요. 생각했던 대로요. 그래서 그런지 촬영을 끝냈을 때 눈물이 나더라고요. 게다가 마지막 신이 요나였을 때여서 마흔이 다 되가지고 핑크색 교복입고 울진 말아야지 다짐했는데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생각했던 시점에 찾아와준 <킬미, 힐미>가 저에게 용기를 준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마흔이 더 기대 되요.

그간 해온 것처럼 선택을 트레이닝을 하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올바른 방향으로 가겠죠. 제 인생이 제가 생각했던 방향으로 가줘서 고마운 거고요. 그리고 진실성에서 만큼은 정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연기했거든요. 그러니까 잘했다가 아니라 저는 솔직하게 했어요. 연기였지만 전 인격이 바뀔 때마다 괴로웠거든요. 남들은 페리박도 재미있고 요나도 웃긴다며 깔깔대고 그랬는데 저는 하나도 안 웃겼어요. 이걸 슬프다고 하면 웃긴 놈이 될 것 같은 분위기여서 , 다음 씬 빨리 가죠그러면서 넘겼는데 사실 전 슬펐거든요. <킬미, 힐미>는 개인적으로 의미 있고 감회도 새롭고 좀 시원한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연기자로서의 스타트 지점에 본격적으로 서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자신감을 갖고 내 뜻대로 뛰어갈 거란 생각을도 하고요.

지금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벌써 29분이 지났거든요

근데 질문도 없는 첫 장(웃음). 그러면 대답을 좀 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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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채은미
  • photo 김영준
  • stylist 윤슬기(INTREND)
  • HAIR 현진(정샘물 인스피레이션)
  • MAKE-UP 은경(정샘물 인스피레이션)
  • design 최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