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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백석과 모밀국수

지난 겨울은 춥고 눈도 많았다. 마치 백석의 시를 낳은 북방의 밤처럼. 고향인 평안도 뿐만 아니라 함경도, 경상도, 일본에 이르기까지 유난히 토속 음식을 좋아했던 시인, 백석. 푸드 스타일리스트 박재은이 이미 작고한 그를 다시 불러내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프로필 by ELLE 2010.03.02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난 백석은 ‘이북 입맛’을 가진 멋쟁이였다. ‘이북 입맛’이라 하면 나처럼 부친의 고향이 이북인 처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기에, ‘멋쟁이’라고 추어올리는 것은 내 입맛에의 자부심도 포함된 것이다. 백석의 입맛을 이야기할 때, 동시대의 평안도 출신인 울 할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할아버지가 아끼던 맛은 대강 이런 것이었다. 담백하고 또 담백할 것. 김치는 사이다처럼 시원할 것. 반주 한 컵을 곁에 두고 천천히 먹고 마실 것. 빈대떡을 위한 돼지고기와 녹두를 너무 곱게 갈지 말 것. 빈대떡 반죽에 고사리를 잊지 말 것. 미리 지져 둔 빈대떡을 다시 데울 때는 오래 쓴 번철에 기름칠을 조금만 하여 천천히 구울 것. 그래야 겉은 바삭하고 속은 수분을 머금은 맛이 나니까.
백석 시인과의 점심은 그래서 평양의 맛 ‘우래옥’으로 정했다. 시인이 메밀을 즐기는 것은 그의 여러 작품을 통해 추종자들이 벌써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다.

거리에서는 모밀내가 났다/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같은 모밀내가 났다
- ‘북신(北新)’ 중

개점 이래 반세기 넘도록 대물림되고 있는 맛의 우래옥 냉면이라면 시인과의 인사로 괜찮을 것 같았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냉면 한 그릇은 그렇게 ‘쿨’하다. 우래옥은 종로의 본점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옛 맛이 난다. 커피색 가죽 시트의 구석진 좌석에 앉아 아직 십 분 정도 남은 약속 시간을 기다리는 일이 아뜩하게 느껴졌다. 나와 마주보는 자리에 쓱 앉은 시인은 고요하고 오래된 바람을 풍겼지만 낡은 느낌의 것은 아니었다. 내 세대의 남자들이 갖지 못하는 표정과 말투로 인사를 건네왔다. 순도 높은 메밀 면을 삶았을 때만 취할 수 있는 ‘면수’를 한 컵씩 받아 마셨다. 아담한 크기의 도자기 컵에서 꽉 찬 메밀밭 내음이 났다. 시인은 후룩거리지도 않고 그 따끈한 면수를 남김없이 마셨다. 우래옥에 냉면을 먹으러 오는 이들은 대부분 핏줄을 이북에 둔 사람들이다. 메밀을 씹는 구수한 맛이 그리워 찾아오는 이들이라 면발을 쇠 가위로 짤뚝짤뚝 잘라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길게 뽑은 면은 반드시 이와 혀로 끊는다. 시인은 음식을 천천히 먹는 편이었다. 우선 육수를 한 두 술 떠마신 후 식초를 조금 넣었다. 무턱대고 초를 치지 않고 미리 육수의 간을 가늠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국수 가락을 젓가락 두 짝이 모자랄만큼 많이 건져 한입에 밀어 넣었다. 나긋한 태도와는 사뭇 다른, 공격적인 매너로 냉면 첫 입을 들었다. 그 많은 면을 한입에 넣고는 그때부터 꽤 우물거렸다. 무언가 말씀을 나누기에 불편하실 것 같아 내가 화제를 잡았다. 나는 ‘모밀’이라고 쓰고 싶어도 표준말이 ‘메밀’이라서 컴퓨터가 제 맘대로 ‘모’를 ‘메’로 바꿔버린다 했더니 시인은 의아해 했다. 평양 냉면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일본식 소바도 좋아하더라는 얘기에 일본에 머물던 시기의 소바에 관한 기억을 잠깐 들려주었다. 나는 고서점가로 유명한 동경 ‘간다’에 있는 100년 된 소바 집보다는 외곽동네 ‘닛포리’의 명물인 오막한 크기의 소바 집이 더 맛있다고 말했다. 아, 소바의 단면이 정 사각형일 때와 직사각형일 때의 차이에 대해서도 십 여분 이야기가 오갔다.
냉면을 먹고 면 삶은 물을 한 잔씩 더 얻어 마신 다음 자리를 옮겼다. 감주 좋아하는 시인의 취향을 고려해서 달콤한 술을 마시며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다. 강남으로 자리를 옮겨 ‘카사 델 비노’에 들어섰다. 와인바지만 폼 잡으며 옆 테이블이나 기웃거리는 이들이 없는 곳. 왜냐하면 이곳의 주인장이 무림 고수이기 때문이다. 와인을 마시지만 모주나 곡주를 마실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홀에 흘러, 여기라면 시인과의 작별 한 모금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21세기의 와인바지만, 요란한 장식이 없는 공간에 앉아 시인은 긴장하지 않고 와인을 마셨다. 루이 14세도 반하게 만든 헝가리 와인 토카이(Tokaji)는 오렌지 즙을 짜 넣은 꿀맛이 혀가 아리도록 기분을 좋게 했다. 당도 높은 술은 짭짤한 안주와 어울리는데, 우리는 이구동성 잘 익은 동치미 무를 건져 두어 쪽 곁들이면 맞겠다고 했다. 한겨울밤 동치미 무랑 말아먹는 국수며 돌나물 김치와 먹는 백설기 같은 맛을 이야기하였다. 250ml짜리 한 병을 비울 무렵, 이제쯤 동치미 무나 꿀에 찍은 파르미지아노 치즈보다는 말린 과일을 섞은 캬라멜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메뉴가 있는지 주인장에게 여쭈러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니 시인은 오간데 없었다. 우리가 앉았던 자리에는 다 마신 토카이 한 병과 두 개의 잔, 그리고 부들거리는 흰 머리카락이 몇 가닥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글/ 박재은(푸드 스타일리스트, <어느날, 파리에서 편지가 왔다> 저자)




* 자세한 내용은 루엘 본지 2월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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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ditor
  • Song Won Se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