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좀 더 느슨하게

만남은 우리에게 기쁨과 발견, 때로는 상실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지금 당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존재들은 어떤가요? <엘르>가 여성의 언어로 전하는 세상의 단면들.

 
‘BL(Boys Love)’이라는 장르를 다들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남성과 남성의 사랑을 다룬, 그러나 현실과는 거의 무관하고 명백한 판타지에 가까운 콘텐츠. 요즘 내 웃음 버튼은 이 장르에 곧잘 등장하는 인물 타입 중 하나인 ‘광공’을 활용한 ‘밈(Meme)’이다. 그렇다면 ‘BL’ 장르 속 광공 캐릭터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돈도 많고 유능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이 살다가 사랑 앞에 미쳐버리는 장신 미남’으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겠다.
 
어쩌다 보니 이성애 로맨스물보다 BL을 더 많이 읽어온 사람으로서 온라인에 떠도는 내용을 종합해 보건대, 광공의 조건은 수없이 많다. 그는 펜트하우스나 저택에 살며 인테리어는 모노톤으로 통일돼야 한다. 광공은 매일 새벽 알람이 울리는 순간 벌떡 일어나 운동하러 가서 탄탄한 근육질의 몸을 유지하며, 아무리 추워도 롱 패딩 대신 코트(캐시미어 100%)만 입고, 찬물로 샤워한다. 광공의 냉장고에는 오로지 생수만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데 선호하는 브랜드는 에비앙이라는 것이 학계 정설로, 음료는 커피(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만을 의미, 라테나 프라푸치노는 안 된다), 술은 최고급 위스키(데이트 시 와인 가능) 정도만 입에 댈 수 있다. 무엇보다 광공에겐 떡볶이, 라면, 패스트푸드 등이 허용되지 않는다. 마카롱, 아이스크림, 씨앗호떡같이 달고 맛있는 음식은 금지다. 마늘과 양파에 대한 금지조항은 따로 없지만, 어쨌든 입에서 냄새가 나면 절대 안 된다. 흡연자라 해도 예외는 없다.
 
“그거 완전 〈양반전〉에 나오는 양반 매매 증서 같은데?” 국문학 전공자 친구가 말했다.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아야 하며, 밥을 먹을 때도 의관을 정중히 쓰고, (중략) 국물을 먼저 떠먹지 말아야 하며, 물을 마실 때도 넘어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며, 수저를 놀릴 때도 소리를 내서는 안 되며 냄새가 나는 생파를 먹지 말아야 한다.”(박지원의 〈양반전〉 중에서) 과연 양반 지위를 돈 주고 사려던 상민이 내키지 않아 했을 법하다. 광공 역시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에게 일신의 편안함과 일상의 행복은 허락되지 않는다. 식욕과 수면욕 등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거세되다시피 한 광공에게 허용되는 것은 성욕뿐이다.
 
오랜 시간 BL의 역사 속에서 살아온 광공이 요즘 여성 사이에서 이토록 애정 어린 놀림의 대상이 되는 현상도 재미있다. 여성 판타지의 총체인 만큼 BL 속 남성 캐릭터는 현실 남성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데, 나는 여성들이 BL을 즐기는 이유 중 하나가 남성의 외모나 행동에 ‘코르셋’을 씌운다는 상상의 권력에 쾌감을 느껴서는 아닐까 생각한다. 현실에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공 밈과 함께 떠오른 것은 여성 사이에서 유행했던 ‘훈녀 루틴’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스트레칭이나 요가를 하고 요거트와 샐러드를 먹으며 독서나 영어 공부를 하고 출근했다가 퇴근 후 반신욕, 1일 1팩, 마사지 등을 빠뜨리지 않는 루틴을 보자마자 지쳐버린 적 있다. 특히 탄수화물을 거의 먹지 않는다는 게 너무했는데, 훈녀이기 위해서는 항상 식욕을 절제해야 한다는 강박이 느껴져 서글프기까지 했다.
 
‘훈녀 루틴’이 광공 1단계 같은 삶이라면 〈부부의 세계〉의 지선우(김희애) 선생은 더하다. 의사이자 주부로서 쉬지 않고 일하는 그는 남편이 바람을 피워 마음이 지옥인 날에도 밝은 미소와 함께 일터로 출근한다. 와인과 네스프레소 버츄오 커피 외엔 별로 뭘 먹는 걸 본 적 없는데 남편과 아들에겐 직접 갈비찜을 해주는 그의 주방엔 물때는커녕 물방울 하나 없다. 집에서조차 허리를 꽉 조이는 옷이나 흰 셔츠를 입는 지선우 선생이 너무 지쳐 보일 때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일단 킬 힐부터 다 내다버린 다음 늘어난 면 티셔츠로 갈아입고 누우면 행복지수가 좀 올라가지 않을까요?’  
 
어떤 여성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쓴 글을 본 적 있다. “한국 여성들은 집단적으로 일종의 과기능(Overfunction) 상태에 있다”고 분석한 그는 연애와 결혼, 출산, 육아 과정에서 여성에게 끝없이 많은 역할과 책임이 요구되는 문제를 지적했는데,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는 한편 많은 여성이 ‘혼자’일 때조차 자신을 편안하게 두지 못하는 문제를 생각했다. 
 
왜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휴식을 취할 때 자책하는 습관을 갖게 됐을까. 왜 여성은 이상적인 몸과 완벽한 삶이라는 목표를 향해 자신을 몰아붙일까. 광공의 하드코어한 라이프스타일이 농담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극단적 판타지임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좀 더 자신을 풀어줘도 괜찮다. 얼마 전 로잘린 앤더슨이라는 노화 연구자가 했다는 말을 보았다. “제정신이 아닌 식이요법을 하지 않아도 삶은 매우 힘들다.” 그러게 말이다.
 
WRITER_최지은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하며 글을 썼다. 〈괜찮지 않습니다〉, 그리고 딩크 여성들의 삶을 인터뷰한 〈엄마가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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