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칠레의 저항 가수 빅토르 하라가 갑작스럽게 처형당했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그의 아내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 무언가 없어졌다는 느낌을 받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아주 깊게 연결된 관계는 그런 식으로 알기도 하는 것이다.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그저 아는 것. 그런 관계들은 삶에서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만남의 은총
」요즘 매일같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나는 미팅이 끝난 후, 나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지켜본다. 온종일 만났지만 실은 그 무엇도 실제로 나누지 않았음을 깨닫는 만남도 있고, 별 대화는 없었지만 함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만한 느낌이 드는 만남도 있다. 이것저것 던지는 질문에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이 아니라 무언가 캐내겠다는 호기심만 느껴져 불편한 만남도 있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내가 더 마음을 열어 이야기하게 되는 만남도 있다.
상대가 힘들어하고 있어 덩달아 힘들어지는 만남도 있고,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같이 힘내 보고 싶게 하는 만남도 있다. 많은 걸 털어놓은 뒤, 했던 말을 다 취소하고 싶은 만남도 있었고, 바보같이 말했어도 진심을 알아줄 거라며 안심하게 되는 만남도 있다. 언젠가는 이런 만남도 있었다. 낮 시간 동안 누군가와 즐거운 농담만 나누다 집에 왔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깨어나 알 수 없는 서러움에 엉엉 울었다. 어쩌면 그녀는 우울증을 견디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그렇게 느꼈다.
대화를 통해 황홀경을 느끼게 되는 만남도 있다. 나는 이런 만남을 은총이 찾아온 만남이라고 부른다. 내게는 15년째 만나는 명상 선생님과의 인연 그리고 친구들과 만든 명상 모임 ‘무화과’가 그러하다. 명상 모임 ‘무화과’는 〈벌새〉를 준비하며 창작하는 친구들과 만든 모임이었다. 우리는 2년간 2주에 한 번씩 만나 모임을 했다. 그날의 리더 진행 아래 각자 돌아가며 현재 느끼는 두려움, 고민 그리고 기쁨에 대해 깊게 나눴다. 우리는 모임의 시작과 끝 그리고 각 구성원의 나눔이 끝날 때마다 함께 명상했다. 대화 모임이 지칠 때면 스튜디오를 빌려 춤 명상을 하기도 했다. 춤 명상은 몸과 세포에 저장된 부정적 감정을 동적 동작으로 털어내며 정화하는 명상이다.
‘무화과’ 모임에서 대화를 나눌 때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자신이 ‘무일푼(Brokenness)’임을 고백할 것과 고치려 드는 ‘수리공식(Shoulding) 조언’을 하지 말 것. 이 두 가지 원칙은 M. 스콧 펙의 공동체 만들기 원칙과 마셜 로젠버그의 비폭력 대화의 원칙을 섞은 것이었다. 우리는 허세 없이 진실을 나누려 했고, 제3자가 아닌 오로지 우리 이야기를 했고, 누군가 힘듦을 나눌 때 함부로 조언하거나 고치려 하는 수리공식 조언을 지양했다. 누군가 그런 조언을 하려고 하면 그날의 리더가 “지금 수리공식 조언을 하고 있어”라고 상기시켜 주었다. 마셜 로젠버그는 그의 책 〈비폭력 대화〉에서 ‘상대방이 충분한 공감을 받았을 때는 1. 긴장이 해소됨을 느낀다. 2. 상대방이 말을 멈춘다’라고 적었다. 우리 모임에서도 공감으로 말이 멈춰지는 순간이 많았다.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는 이유는 사실 공감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진심 어린 공감이 오갈 때, 그곳에는 고요한 침묵이 찾아온다.
우리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 무일푼임을 고백했다. 그리고 모임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는 늘 깊고 웅장한 풍요를 느꼈다. 나는 구성원들에게 “너희가 내 가장 친한 친구들이야”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짝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어떤 것, 우정 그 이상의 것을 느끼게 해주는 친구들이다. 그렇게 나를 투명하게 알아주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 만남은 환희와 존경심 그리고 슬픔을 동시에 준다.
이 만남이 내게 ‘좋은’ 만남인지 알아보는 쉬운 방법이 있다. 누군가를 만날 때와 후의 몸 상태를 관찰하는 것이다. 진실로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나면 근육의 이완이 일어난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약속을 잡는 것에 있어 물 흐르듯 수월하다. 몸은 정직하고 자신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사람을 기어이 다시 만나려 하기에.
법정 스님은 시 ‘그리운 사람’에서 이렇게 썼다. ‘영혼의 울림이 없으면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다.’ 마음 깊이 바란다. 당신을 만날 때 우리가 영혼을 나눌 수 있기를. 그 일별이라도 느낄 수 있기를. 우리가 서로의 몸과 마음을 이완할 수 있기를.
writer_김보라
첫 장편영화 〈벌새〉로 국내 외 59개의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를 이야기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을 뿐인데 타인과 맞닿는다는 것.
그 감정과 마음이 오가는 게 기뻐서 영화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