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우리는 무모한 사랑을 한다

만남은 우리에게 기쁨과 발견, 때로는 상실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지금 당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존재들은 어떤가요? <엘르>가 여성의 언어로 전하는 세상의 단면들.

 
고로가 세상을 떠났다. 나와 11년 3개월을, 동거인과는 3년 6개월을 함께 살았던 고양이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고, 부드럽게 움직이며 나와 눈맞춤하던 존재에게서 그 모든 생명의 속성이 사라짐을 목격한다는 건 슬픔과 상실감 이전에 충격이자 공포다. 그럼에도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많은 사람이 이미 지나왔거나 언젠가는 통과할 과정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반려동물의 수만큼이나 많은 이별이 조용히 치러진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니기에 조금 덜 힘든 고통이 있다면 서로를 위해 공유해도 좋을 것이다.
 
고양이 나이 변환기에 11년 6개월이라는 숫자를 넣어봤더니(고로는 3개월 된 청소년 길냥이일 때 나에게 왔다) 사람 나이로 62세가 나왔다. 적지는 않지만 죽을 만큼 충분히 늙은 나이도 아니다. 100세가 나와도 받아들이기 쉬울 리 없다. 동물의 생애는 인간보다 훨씬 속도가 빠르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들은 아기처럼 느껴진다. 인간이라면 노화하며 자연스럽게 보이는 죽음의 징후들도 보송한 털 아래 가려진다. “개나 고양이를 입양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분명 자기보다 먼저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 왜 키우는 거야?” 몇 년 전 지인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다.  
 
SNS로 부고를 알리자 위로의 댓글이 이어졌다. “좋은 데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고양이 별에서 지켜볼 거예요.” 지극히 친절한 말들이 고마우면서도 어쩐지 마음 깊은 곳까지 와닿지 않았다. 자기 고양이 이름 뒤에 명복을 빈다는 말이 붙어 있는 걸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제 막 벌어진 사건의 초입에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두고 다른 사람들은 결말까지 다 내버린 것 같았다. 천국인지 무지개 다리 너머인지 먼 곳을 향하는 인사말들을 멍하니 흘려듣는 동안 내 마음은 아무 데도 못 가고 고양이와 함께 집에 붙박혔다. 현관 중문을 열 때, 샤워 커튼을 걷을 때, 부엌 물그릇 앞에 동그랗고 커다랗게 앉아 있는 고로가 자꾸 보였다. 더 아픈 쪽이 환영인지, 그 환영마저 점점 옅어지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주변 도움에 의지하며 며칠을 지났다. 친구들이 번갈아 죽을 쑤고 과일을 썰고 반찬을 포장해서 가져다주었으며, 고양이의 마지막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죄책감을 토로할 때 들어주었다. 각자 고로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부분을 떠올려 들려주기도 했다.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온 것, 무릎에 올라와 앉았을 때 얼마나 무거웠는지…. 친구들이 그런 기억을 나눠줄 때면 국화꽃을 한 송이씩 건네받는 것 같았다. 네가 고양이를 많이 사랑했구나, 고양이는 너에게 많이 사랑받았구나 하는 말들이 어깨에 따뜻하게 담요를 둘러주었다. 멀리 어딘가로 떠나보내기 전에 아직은 생생한 기억을 붙들고 쓰다듬을 수 있었다. 애도하는 시간을 가지며, 혼자서 반려동물과 사는 내 싱글 친구들을 생각했다. 언젠가 그래야 할 때가 오면 나 역시 죽을 쑤고 과일을 썰고 반찬을 포장해서 그들의 곁에 있어줘야겠다고.  
 
반려동물 장례식장에서는 각각의 방에서 추모 시간을 가진 다음, 유리창 안쪽에서 화장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한다. 담당자는 동작의 낭비 없이 몸가짐이 단정한 분이었다. 다 타고 나서 남은 뼛조각을 핀셋으로 골라내 항아리에 담는 과정은 참 느릿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일상생활이 뭔가 어눌하게 더뎌지고, 너무 울어서인지 눈에 초점이 잘 맞지 않고, 전처럼 일하는 속도가 나지 않아서 스스로 답답해지면 그때를 떠올린다. 유골을 하나씩 함에 담던 느릿한 몸짓을. 슬픔을 처리하는 속도는 도저히 신속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다음날, 유골을 깎아 제작한 스톤을 찾으러 다시 가서 기다리는 동안 납골당을 둘러봤다. 작은 추모함 칸마다 강아지, 고양이의 사진과 함께 밥그릇이나 목걸이, 다녀간 가족들의 편지가 보관돼 있었다. 어느 시추 가족들이 남긴 메모 가운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마리야, 엄마가 요즘 자주 찾아오지 못해서 서운했지? 몇 달 동안 엄마가 임영웅이라는 가수에게 빠져 있었어. 미안해, 하지만 우리 마리를 잊어버린 적은 없어.” 눈물이 흐르는데 웃음이 나왔다.
동거인과 나는 매일 시간을 내어 같이 걷는다. 몸을 움직이다 보면 묵직하게 가라앉던 감정도 조금은 떠오른다. 걷다가 길냥이들을 마주치면 곁에 간식을 놓아주고, 오래 살라는 인사를 건넨다. 산책하는 개들을 보면서는 세상에 이렇게 무모한 사람들이 많다는 데 새삼 놀란다. 틀림없이 상실을 겪을 줄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을 한다. 아무 관계도 맺지 않는 안전보다 다 가졌다가 전부 잃어버리는 위험을 선택한다.  
 
2주가 지났다. 눈물이 나면 울기도 하지만 행복한 순간을 애써 만들려고 노력한다. 마리는 잘 지낼까? 임영웅에게 질투를 느꼈을까? 엄마가 다시 웃는 걸 보며 같이 좋아했을 것 같다. 우리의 삶에 고유한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건 만나고 사랑하고 함께 지냈던 기억이다. 최근 2주의 힘든 기억까지 고스란히 안고 11년 3개월 전으로 돌아가 어린 길냥이를 만난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할까? 아니, 다시 한 번 기꺼이 무모해질 것이다.  
 
WRITER_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저자이자 운동 애호가. 오랜 시간 잡지 에디터로 일하며 쌓아온 경험을 살려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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