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보이지 않는 여자들

만남은 우리에게 기쁨과 발견, 때로는 상실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지금 당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존재들은 어떤가요? <엘르>가 여성의 언어로 전하는 세상의 단면들.

보이지 않는 여자들

신혼부부, 갓 혼인한 여성과 남성을 일컫는 말이다. 언제까지를 신혼이라고 부를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2년? 5년? 누군가는 “상대가 외도하기 전까지”라고 말하며 웃었다. 어쨌든 신혼부부가 될 수 있는 나이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스물에 하든 여든에 하든, 갓 결혼하면 무조건 신혼 아닌가? 하지만 국가에는 확고한 기준이 있었으니! 
 
국토교통부(이하 국토부)가 2006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주거실태조사는 주택 공급 확대 등 정부가 관련 정책을 정하는 데 중요한 기초 자료로 사용된다. 지난 6월 1일, 국토부가 발표한 2019년 주거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토부가 정의하는 신혼부부 가구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혼인한 지 7년 이하이면서 여성 배우자의 연령이 만 49세 이하인 가구를 말함.’
 
‘7년 이하’라는 신혼부부의 기준은 그렇다 치고 왜 굳이 여성의 나이에 제한이 있을까? 한국 여성의 완경이 평균 50세임을 고려하면 ‘49세 이하의 여성 배우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이 발표를 두고 온라인에서 비난이 쏟아지자 국토부는 “차별할 의도 없이 ‘가임기 여성’을 대상으로 신혼부부 가구를 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조사 자체가 여성이 ‘출산 도구’라는 관점에서 설계됐음을 재확인해 준 셈이다.
 
이런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한 정부의 주거 지원 혜택은 주로 예비 정상 가족인 신혼부부에게 돌아간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어릴 때 모래 장난하며 부르던 구전 동요 가사를 다음과 같이 바꿔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결혼해라 결혼해 네 집 줄게 아이 다오.” 이쯤 되면 정부는 출산과 아파트를 거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국가기관이 여성의 몸을 재생산 용도로 본 사례는 이번만이 아니다. 2016년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가 만든 ‘대한민국 출산 지도’가 대표적이다. 당시 행정자치부는 각 시도별 가임기 여성 인구수를 파악해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자기 멋대로 ‘출산 지도’를 그렸다. 2019년 강원도는 신혼부부 주거 지원 사업에서 여성 나이만 44세 이하로 제한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에 비하면 이번 국토부의 만 49세는 덜 모욕적인 건가?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는 형사사건으로 처리되지 않는 가정 폭력, 성폭력 피해 여성의 수가 얼마에 이를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왜? 제대로 조사된 적조차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관심은 여성이 가정 폭력에 노출돼 있느냐 아니냐보다 여성이 출산 가능하냐 아니냐에 온통 쏠려 있다. 무엇을 헤드라인으로 내보낼지보다 무엇을 보도하지 않는지가 뉴스 매체의 기조를 보여준다면 국가기관의 정책도 마찬가지다. 지금껏 각 부처는 여성의 출산 가능성을 수치화하는 데 집착하느라 그 외 여성의 몸과 건강, 무급 노동, 욕망, 친밀한 관계에서 남성에 의한 폭력 등에 대해서는 묻지도, 조사하지도 않았다. 우리에겐 여성에 관한 데이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영국의 여성운동가 캐롤라인 크리아도 페레즈는 저서 〈보이지 않는 여자들 Invisible Women: Exposing Data Bias in a World Designed for Men〉에서 이런 데이터의 부재를 ‘젠더 데이터 공백’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방대한 데이터 팩트 체크를 통해 현대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데이터 통계 역시 남성에 편향돼 산출되고 있으며, 따라서 도시계획, 의료, 건축, 자동차, 공중화장실, 스마트폰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여성은 지워지고 고려되지 않고 있음을 증명한다. 남성이 설계하고 남성이 표준인 세상에서 우리가 여성으로 살아오며 온몸으로 느낀 ‘공백’의 감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국토부 장관의 시선으로 보면 만 34세 이상이면서 결혼하지 않은 나 같은 여성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 정부의 주거 지원 대상도, 저금리 주택 대출 가능자도 아니다.
 
그럼 이런 사람의 수가 적을까? 성별의 비율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번 서울시 재난긴급생활비를 신청한 223만 가구 중 1인 가구는 43.1%에 달했다. 2인 가구 26.8%를 훌쩍 뛰어넘는 숫자다. 사람들의 삶은 이미 바뀌었다. 그러니 정부는 하루빨리 ‘정상 가족’이라는 판타지에서 벗어나 제도와 정책으로 이 변화를 뒷받침해야 하지 않을까? 개별 시민을 기본 단위로 사회가 재편되고 혈연 중심 가족주의가 해체될 때 여성을 출산 도구로 대하는 방식도 해체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알아채게 될 것이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여성 1인 가구의 존재 그리고 그 존엄함을.
 
writer_김진아
광고와 공간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는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책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를 썼다. 〈뉴욕 타임스〉에 서울의 페미니즘 공간으로 소개된 ‘울프소셜클럽’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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