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정상 가족 밖의 정상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6월. 혈연이든, 뜻을 같이하는 친구나 공동체이든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연결돼 있다는 감각,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정상 가족 밖의 정상

지난여름, 오래 탄 미니 쿠퍼를 처분하고 차를 바꿨다. 시승하고 새 차를 고르면서 30대 때와 기준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문짝이 두 개인 차는 제외했다. 운전의 재미보다 편안한 승차감, 안전성과 안락한 실내공간이 고려 대상이 됐다. 그야말로 ‘가족이 타는 차’를 고르게 된 것이다. 다만 보통의 가족이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로 이뤄진다면 우리 가족은 여자 둘과 고양이 네 마리다. 동거인 김하나 작가와 나는 번갈아 운전대를 잡고 점점 나이 들어가는 우리 고양이들을 태워 종종 병원에 간다. 우리는 같이 살면서 쓴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인세 수입으로 구입한 SUV 말고도 여러 가지 물건을 함께 사서 나눠 쓰고, 서로의 책과 음반 컬렉션을 공동의 클라우드 데이터베이스처럼 활용하며, 주방과 거실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드라이브와 여행의 기쁨도, 책 중쇄의 성취감도, 고양이들이 아플 때의 슬픔과 돌봄 노동도 함께 나눈다. 가족은 감정의 버팀목이자 가장 작은 공유경제 단위라는 것을 경험하는 중이다.
 
여자 둘이 전세금을 합쳐 공동 명의로 아파트를 사고 같이 사는 이야기가 담긴 우리 책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은 세대에 따라 나뉘었다. 50~60대는 ‘결혼을 안 하는 선택지도 인생에 존재하는구나’ 하는 지점에서 놀라움을 표했으며, 30대 이하는 ‘아파트를 샀다’는 대목에 자기 일처럼 쾌감을 드러냈다. 어쩌다 보니 40대 비혼 아이콘 비슷하게 돼버렸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보는 경험을 통해 오히려 결혼의 장점을 더 깊이 이해하는 중이다. 싱글 여성으로서 20년 가까이 혼자 살면서 늘 불안하고 아쉽던 주거 안정성을 해결해 보려던 새로운 시도가 가져다준 보상 때문이다. 정서적 충족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경제적 이득은 기대보다 컸다.
 
대출금 상환이라는 공동 목표가 주어지자 느슨했던 소비생활에 긴장감이 생겼고, 빚을 갚는 속도보다 아파트 가격이 오르는 속도가 빨랐다. 생활이 안정되니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고, 커리어가 잘 풀리면서 수입도 커졌다. 돈을 모은 결과 집을 살 수 있게 된 게 아니라, 집을 사니까 모여드는 운에 돈도 포함되는 느낌이랄까. “너도 어서 결혼해야 돈 모으지.” 이 말을 어떤 비밀결사대로 초대한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겪어보니 팩트는 ‘규모의 경제 속으로 힘을 합칠 때 큰 효율과 시너지가 발생한다’는 거지, 그게 반드시 결혼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자본금을 모으고, 양가 부모님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끌어오고, 대출을 매달 갚아나가는 의무 속에 스스로를 묶어보는 과정이 한국에서는 많은 경우 결혼과 결부돼 벌어진다. ‘결혼하고 싶다’는 한국 여성의 욕망을 뜯어보면 ‘독립하고 싶다’ ‘더 넓은 집을 갖고 싶다’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 등의 바람과 뒤섞여 있는 걸 본다.
 
겪어보니 ‘힘을 합칠 때 시너지가 발생한다’는 거지, 그게 반드시 결혼일 필요는 없었다. 
 
책이 나오고 진행된 여러 차례의 북 토크 가운데, 등에 업은 아기까지 아이 셋을 데리고 온 여성이 있었다. 두 아이가 뛰어다니고 아기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남편이 셋을 다 데리고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질문을 하기 위해 손을 든 그는 막내가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처음으로 혼자 있어본다고 했다. 아이들을 여럿 키우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와 가사만 전담하고 있으며, 남편은 직장 일이 더 바빠져서 새벽에 나가 밤늦게 들어온다고 했다. 그 여성은 말했다. “저는 두 분과 다르게 제때 결혼해서 정상 가족을 이뤘지만….”
 
‘정상 가족’이라는 단어가 그때처럼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없었다. 나는 그녀가 자기 삶을 비교할 대상이 나 같은 싱글이 아닌, 자신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 셋을 낳아 키운다고 직장을 그만두는 남성이 있던가? 애가 셋이라고 9개월 동안 혼자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아빠가 있던가?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남성들이 개인 커리어에서 바꾸고 희생하는 부분이 뭐지? 여성의 희생과 헌신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정상성’은 확립이 가능한 것일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타협하지 않으며, 나답게 살기 위한 선택을 해왔을 뿐인데 나는 어느새 ‘정상 가족’ 바깥에 살고 있다. 지금의 삶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가족을 꾸린다는 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힘이 되는 든든한 일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동반자는 어떤 자질과 품성, 삶의 규율과 태도를 가져야 할지 세밀하게 쪼개서 생각해 봐야 한다. 쪼개고 쪼개서 들어가 보면 그런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진짜 필요한 것은 결혼이 아니라는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다르게 사는 선택지도 있다. ‘정상 가족’ 에 대한 막연한 동경 혹은 의무감으로 낙관에 차서 돌진했다가 깨지고 다치는 쪽은 분명 여성이 많다.
 
차 얘기로 돌아가 보면, 처음 보험 견적서가 오갈 때보다 결국 수십만 원 오른 금액을 내게 됐다. 내 이름을 보고 남자인 줄 알고 ‘부부 운전자 한정’ 견적을 뽑았다가 부부가 아니라니까 갑자기 금액 산정이 달라진 것이다. 운전 경력을 합하면 거의 50년인 여자 둘이 차를 모는데 왜 부부보다 덜 안전하다고 간주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거야말로 좀 비정상이야.
 
WRITER 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저자이자 운동 애호가. 오랜 시간 잡지 에디터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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