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우리는 언제 가장이 될까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5월. 혈연이든, 뜻을 같이하는 친구나 공동체이든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연결돼 있다는 감각,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언제 가장이 될까

집에 들어올 때, 예전에 없던 습관이 생겼다. 건물 입구의 편지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이 작은 상자에 유독 신경 쓰게 된 이유는 하나다. 요즘 시대에도 우편물로 날아오는 공과금 고지서가 오늘은 도착하지 않았을지, 예의 주시하고 있는 탓이다. 지금 집으로 이사 온 지 고작 열흘. 이사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 집은 내 힘으로 얻은 첫 집이기에 기대와 걱정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상태다. 가스비, 전기세, 수도세…. 이제 처음으로 공과금을 직접 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유독 가장이 됐다는 기분을 느낀다.
 
“엄마가 이제 마이너스다.” 부모님이 별거를 시작하고 4년 정도 지난 어느 날, 방문을 열고 들어온 어머니의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그때 나는 스물네 살이었다. 경제적 책임을 지는 실질적 ‘가장’이 된 이후 목돈이 필요했던 어머니는 오래 일한 직장에서 퇴직금을 한 번에 받는 쪽을 택했다. 월세 100만 원이 넘는 집에서 어머니 그리고 어느덧 대학생이 된 나와 언니, 여자 셋이 생활을 이어가던 참이었다. 졸업을 몇 번이고 유예한 언니는 취업 의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마이너스’라는 말은 비틀거리는 언니를 보다 못한 어머니가 내린 극약처방 같은 선언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이 가정을 이끌어갈 수 있는 돈이 더 이상 없다고.
 
어머니의 극약처방은 언니보다 나에게 효과를 보였다. 미루고 있던 취업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취준생’으로 1년을 지낸 뒤 시작한 인턴 생활 첫 월급은 87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조금씩 ‘가계’에, 어머니에게 돈을 드릴 수 있게 됐다. 인턴 생활을 마친 뒤에는 월급 200만 원이 채 안 되는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어머니에게 드릴 수 있는 돈도 조금씩 늘어났다. 어떻게든 수입을 늘릴 수 있는 창구를 늘려가며 월세도 내가 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나, 단둘이 살게 된 이후에는 세대주에 내 이름이 자연스럽게 올랐다. 그렇게 나는 ‘가장’이 돼갔다.
 
미디어에 비친 ‘가장’의 모습은 대부분 남자다. 부양의 무게를 짊어진 가장의 무거운 어깨나 애환을 이야기할 때을 중년 남성의 모습을 주로 그려내곤 한 이다. 식당과 마트, 건물 청소 등 수많은 곳에서 중년 여성 노동자를 마주하지만 그들의 노동은 생계를 부양하는 ‘가장’의 이미지로 소환되지 않으며,  ‘아르바이트’ ‘용돈 벌이’ 같은 정도로 취급받는다.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맞벌이이거나 가족의 생계는 물론 가사와 돌봄 노동까지 책임지는 수많은 여성이 존재하는데도 말이다.  
 
부양할 누군가가 생길 때, 우리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가장이 된다. 부양 대상은 다양하다. 가족과 친척 같은 혈연일 수도 있고, 반려동물일 수도 있으며, 자기 자신을 책임지고 부양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시기가 빨리 찾아오기도 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공과금 고지서를 받는 일을 영영 겪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의무를 해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나는 부모님 그리고 이내 어머니라는 경제적 울타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세미 가장’으로 지난 몇 년을 영위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거처를 안정적으로 마련하고 내 공간을 마련해 진짜 ‘독립’한 요즘은 또 다르다. 지금 나는 자신을 부양한다. 어떻게 보면 가장이 된다는 건 내 삶을 이어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세미 가장’을 졸업해 진짜 가장이 돼 맞는 첫 달. 나는 처음으로 맞이할 공과금 폭탄마저 설렌 마음으로 기다리며 잠 못 들고 있다.
 
WRITER 이은재 SBS PD. 유튜브 콘텐츠 〈문명특급〉 MC 혹은 ‘연반인 재재’로 좀 더 친근하다. 가볍고 재기발랄한 방식으로 세상에 생각할 거리를 던지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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