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아름다움으로부터 떠남

우리는 고통과 슬픔에서 달아난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 아름다움과 기쁨으로부터 달아난다. 아름다운 것보단 스트레스와 고통이 더 익숙한 옷이기 때문이다.

 
영화 〈벌새〉 스틸컷

영화 〈벌새〉 스틸컷

태양 아래의 기쁨

작년, 영화 〈벌새〉의 개봉과 함께 종종 떠올랐던 기억이 있다. 첫 단편을 찍었던 2002년 여름이다. 장소 문제로 제법 많은 컷을 몇 시간 안에 다 찍어야 했다. 촬영은 다행히 잘 끝났고 다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잠시 무리에서 나와 홀로 식당 화장실 안에 서 있었다. 그날의 촬영이 좋았고 몇 시간 동안 신나게 한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상한 어떤 기쁨이 차올랐다. 다시 식당으로 돌아갔을 때, 스태프 친구들은 내가 울고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서둘러 촬영한 것에 속상해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다며. 설명할까 하다, “그런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정도로 웃으며 짧게 답했다. 그때 간직하고 싶던 비밀스러운 마음. 촬영이 너무 재밌고 설레었던 그 마음. 왜 설레던 마음을 비밀로 하고 싶었을까. 그것은 내게 오랫동안 머물던 두려움 때문이었다. 삶에서 행복한 순간에 문득 찾아왔던 심연과 공포.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유치한다고 생각했었다. 상실이 두려워서 사람을 못 만난다는 이야기 같은 걸 들으면, 통속적인 드라마 같다고 생각했었다. 삶을 살아갈수록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느낀다. 비웃었던 것, 유치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에게도 있음을 아는 것은 나르시시즘으로부터, 안다고 착각하는 마음으로부터 해방한다.
 
서른 살에 내 삶에 큰 무늬를 남긴 A를 만나게 되었다. 그전까지의 연애는 비교적 평온하거나 혹은 무덤덤한 역할 수행이었다. A와의 관계를 통해 나는 깊고 다채로운 감정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만질 수 있게 되었다. 그 감정들이 가져온 또 다른 감정은 공포였다. 우리가 연애를 시작한 지 몇 달쯤 지났을 때, A가 며칠 여행을 가게 되었다. 단 며칠이었다. 한낮의 집에서 문득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마치 아이를 잃은 엄마처럼 혹은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자신도 믿기지 않는 풍경이었다. 몇 시간 후, A에게 전화가 왔다. A의 목소리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광포한 울음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나는 A를 온몸으로 밀어내는 것을 선택했다. 우리는 지난한 1년을 보내다 헤어졌다. 그 후로 몇 년을 그때의 일을 해석하고, 재경험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이별을 하고, 대학들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B 대학에서 첫 수업을 시작했기에, 다른 어느 대학보다  B 대학에 더 깊은 애정이 갔다. 선생님으로서의 나를 상상해본 적은 별로 없었는데, 막상 수업을 시작하고 강의가 재밌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대학 시절 들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수업을 가르쳤다. 그때, 글쓰기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요청했던 과제는 ‘내 마음을 가장 찢어놓는 것을 쓰기’, ‘삶에서 나를 뒤흔든 사람에 대해 쓰기’, ‘ ‘자신과의 데이트 후, 후기 쓰기’, 등이었다. 에세이를 써온 학생들이 글을 낭송하면, 모두가 귀 기울여 들었다. 일종의 실험 같던 수업을 학생들은 무척 사랑해 주었다. 학생들은 내게 삶의 문제에 대해 종종 물어봤다. 그 질문들에 답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기에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마음으로 듣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눈에는 열정으로 착취당하는 바보 같은 시간 강사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내 선택이었다. 수업에 최선을 다했고, 학생들을 온 마음으로 만났다.
 
어느 해, 종강 날 돌아가면서 수업의 소감을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수업을 듣기 전에는 동기들을 다 좋아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수업에서 동기들의 에세이를 읽고 나서는 싫어했던 동기들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그 소감은 강의하며 지냈던 몇 년을 아름답게 기억하게 해준다. 몇 해 후,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의 단편 작품들이 영화제에서 대거 상영되었다. 여름의 어느 날, 영화제에서 영화들을 다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 행복한 감정이 느껴졌다. 학생들의 작품은 아름다웠다. 만듦새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깊게 와닿았다. 누군가의 피어남을 목격하는 것,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세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삶에서 처음 경험해보는 새로운 형태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애정을 담아 강의했던 B 대학을 그만두었다. 〈벌새〉에 집중하고 싶다고 하며 떠났으나 정작 다른 학교의 강의들은 이어 나갔다. 30대를 돌아보며, 그 시절 가장 먼저 B 대학을 그만둔 것은 A에게 했던 행동과 비슷한 연유였음을 깨달았다. 강의를 그만두고 느낀 첫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학생들이 수업을 사랑하는 것이 감사하면서도 떠나고 싶었다. 때로 일상에서 바보 같은 행동을 할 때면, 학생들이 나를 이상적인 선생님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빛나는 것이 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빛나는 것이 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종종 깨지기 전에 떠나야 했다. 그 마음이 2013년에 썼던 시나리오 〈벌새〉에서 영지 선생님을 사라지게 한 이유 중의 하나였으리라.
 
우리는 고통과 슬픔에서 달아난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 아름다움과 기쁨으로부터 달아난다. 아름다운 것보단 스트레스와 고통이 더 익숙한 옷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원하는 것은,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편안해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멋있다고 생각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내 모습에 관대해지고 싶다. 그리고 깨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간다. 누군가가 떠나도, 누군가가 죽어도, 모임이 깨어져도 나눴던 사랑, 에너지 그리고 기억은 우리의 마음에 남는다.
 
황무지처럼 끝났던 이별 후, 몇 년이 지나 A와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폭풍 같은 감정들을 거둬내고 일상의 인간으로 서로를 응시하게 되었다. 그 응시에는 상대를 더는 환상으로서 바라보지 않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벌새가 끝나고, B 대학에서 한 첫 수업의 학생이자 벌새의 연출부였던 친구와 대화를 했다. “〈벌새〉 전에는 선생님이 제 롤 모델이었어요. 이상적으로만 보였어요.” 내가 물었다. “그럼 지금은?” 그 친구는 장난스레 “이젠 현실적으로 보여요.”라고 답했다. 우리는 함께 상쾌하게 웃었다.
 
잠시 한국을 떠나와 있다. 〈벌새〉의 긴 여정 후에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먼 나라에서 매일 밥을 짓는다. 이런 일상들은 때로 단조롭지만, 조용한 기쁨을 준다. 일상적인 것들, 일상을 견디는 관계들, 이것은 조금씩 더 성장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밝은 태양 아래의 기쁨이다. 때로 일상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런 시기가 다시 와도 자신의 우스꽝스러움에, 두려워하는 ‘작은’ 마음을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고 싶다.
 
WRITER 김보라 첫 장편영화 〈벌새〉로 국내외 50여 개의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를 이야기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을 뿐인데 타인과 맞닿는다는 것. 그 감정과 마음이 오가는 게 기뻐서 영화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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