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운을 만드는 사람

작가 황선우는 생각한다. 일을 하는 우리에게 운을 좋게 만든다는 건, 나를 남들에게 좋은 사람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10년 넘게 다녔던 회사에서 한 해를 시작하는 행사는 시무식이었다. 1월 2일,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로 회장님이 올라오신다는 기별이 무전으로 오면 전 직원이 복도에 도열해 한 사람씩 악수를 했다. 매년 경험한 의례라 특별할 것도 없었던 이 행사들 가운데 어느 해인가 인상적이었던 한 마디가 기억난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여러분, 새해에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습관적으로 하죠? 그런데 가만히 있는데 누가 와서 복을 주나요? 복이 저절로 주어지는 경우는 없어요. 우리가 새해 인사를 나눈다면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새해 복 많이 만드세요’ 하고 말입니다.” 글 쓰는 일을 하면서 언제나 관습적인 언어 사용이 우리의 사고를 가둔다고 여겨왔는데, 한 해를 잘 보내라는 덕담에도 무척 수동적인 삶의 태도가 깔려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한국 재벌가에서 태어난 회장님이야말로 복을 넝쿨째 받은 사람 아닌가. 자기 복을 어떻게든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건 나를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일 뿐. 게다가 1년 내내 능동적으로 살아봐야 아무 성과 없이 지칠 때가 많다. 그래서 한 해가 끝나고 또 시작될 때 우리는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으로 그렇게 사주를 보러 다니고, 타로 카드의 그림을 앞에 두고 미래를 물어본다. 새해에는 애쓰지 않아도 다 잘될 거라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서 듣고 싶은 것이다(내 경우 이직을 앞두고 본 타로점에서 ‘동굴 속의 은둔자’ 카드가 나온 이후로 기분 나빠서 타로를 끊었다. 과연 옮긴 회사에서는 내내 은둔하며 야근했다).
나는 촘촘하게 열심히 살아도 잘 안 풀리는데, 남들은 띄엄띄엄 살아도 큰 성공을 거두는 것 같을 때 좀처럼 내 편이 돼주지 않는 운을 탓하게 된다. 잡지 에디터로 일하는 동안 성공한 사람들, 좋은 운이 함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시도한다는 거였다. 1세대 메이크업 인플루언서로 스타가 된 A에게 발 빠르게 트렌드를 포착한 비결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해보고 망하면 다른 걸 하면 되니까요.” 인생을 길게 놓고 봤을 때, 패션 매거진에서 인터뷰를 청하는 시점이라면 아마 그 사람의 운이 꽤 충만한 시기일 것이다. 다만 그들 역시 동굴 속에서 은둔하는 시기가 있었을 텐데, 그런 모습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많은 시도를 해서 성공률을 높이는 사람이며, 실패했을 때 금방 털고 일어나는 회복탄력성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아는 친구 B는 매주 같은 번호로 복권을 산다. 내 경우 복권에 당첨되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며 1등에 당첨되면 사고 싶은 강남의 아파트도 다 정해두었지만 사실 귀찮아서 실제로 구매는 하지 않는다. B가 로또 당첨자가 될 확률은 아주 낮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로또 당첨자가 될 확률은 0이다.
 
행운은 많은 순간 사람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일을 하는 우리에게 운을 좋게 만든다는 건, 곁에 있고 싶은 사람,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 추천하고 싶은 사람의 상태로 나를 유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C라는 사람에게 커리어 상담 메일을 받았다. 어떤 분야에서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자신이 원하는 회사에는 자리가 나지 않아, 차선으로 더 작은 회사에서 다른 직무의 일을 시작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자기 마음에는 어느 정도 답을 갖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나도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왔기에 90%까지 자기 결정을 내렸어도 10%의 확인을 타인에게서 얻으려는 마음을 안다. 보낸 사람의 글보다 더 길게, 꽤 성의 있는 답장을 보냈다. 절실함이 느껴져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회신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 일이 있은 직후 그쪽 업계에서 일하는 후배를 만났다. 이런저런 근황 틈으로 어렵게 뽑은 인턴이 1주일 만에 회사를 그만둬서 사람을 새로 뽑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정확하게 C가 원하는 업종과 회사, 직무였다. 하지만 나는 C를 추천할 수 없었다. 메일을 씹힌 것이 기분 나빠서가 아니다. 아마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 정도의 한 줄만 답했더라도 나는 후배에게 C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다. 한번 이력서나 받아보라고. 하지만 메일 회신이라는 기본적 업무 처리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추천해서 내 리스크를 만들 이유는 없었다. C는 몇 주 뒤에 늦은 답장을 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은 이미 그 사람을 비켜간 다음일 것이다.
행운은 많은 순간 사람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평생 일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운을 좋게 만든다는 건 누군가 곁에 있고 싶은 사람,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 추천하고 싶은 사람의 상태로 나를 유지하는 것 아닐까? 많은 처세술서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이야기가 결국 비슷한 동어반복인 것 같기도 하다.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어라, 불평불만을 그만두어라,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해라, 자신의 취약점까지 인정하며 성장해라 등등. 사람들이 모두 어떻게든 연결돼 있다는 걸 인지하고 받을 것을 계산하기 전에 먼저 주는 일,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하게 피드백하는 행위가 운을 좋게 만드는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만드시길.  
 
Writer 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저자이자 운동 예찬론자. 오랜 시간 잡지 에디터로 일한 그는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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