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중년이 되고 보니

작가이자 운동 애호가인 황선우의 나이 이야기.

 
전라도 장성과 담양, 충청도 부여와 아산을 거치는 가을 여행을 다녀왔다. 돌아와서 스마트폰을 보니 사진첩에는 온통 단풍과 음식 사진들로 가득하다. 노랗고 빨갛게 물든 국립공원을 등산하고, 맛집을 찾아다니며 그 지역에서 만들어 유통하는 막걸리를 맛보고, 온천에서 여독을 풀고…. 중년들이나 한다고 생각했던 방식의 여행을 내가 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뭐긴, 내 나이가 이미 중년이라 벌어진 일이다. 77년생인 나는 내년에 마흔넷이 되니까 빼도 박도 못하는 40대 중반이다.
 
중년이라는 건 스스로도 약간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지위이지만, 나이 먹는 일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내 경우 20대보다 30대가, 30대보다 40대가 점점 더 좋았다(지금까지는). 나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남편이나 아이도 없고, 얼마 전에 회사도 그만두고 프리랜서가 됐다. 어른들이 걱정할 만한 요건은 다 갖춘 채로 나이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어린 시절 막연하게 그렸던 40대 중반의 모습과도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지금의 내가 괜찮고, 지금 나이가 나쁘지 않게 여겨진다는 이야기를 더 어린 세대 앞에서 많이 하려고 한다. 서른 이후의 삶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절에는 ‘나이 든 여자’가 된다는 사실만으로 막연하게 두려움까지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나이에 민감하다. 서로 이름 대신 ‘언니’ ‘오빠’라 부르는 호칭과 존댓말 체계는 대학이나 회사에서 동기로 만난 사람들까지 상하 관계 설정을 하게 만든다. 게다가 입학과 졸업, 취업, 결혼, 출산 같은 인생의 굵직한 이벤트들이 어떤 나이에 성취해야 하는 과업처럼 주어지며 그 트랙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을 특이 취급한다. 나이에 대한 기준이 더 변태적으로 적용되는 건 여성 한정이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신입생을 환영하는 동시에 같은 과 3학년 언니들을 늙은이 취급하던 (더 늙은)남자 선배들을 기억한다. 그 언니들은 고작 스물두세 살이었는데! 회사나 동호회 같은 새로운 커뮤니티에 속할 때마다 비슷한 패턴이 벌어졌다. 언제나 상대적으로 어린 여자들이 나이와 외모로 찬양받는 동안, 시니어인 여자들은 후려침을 당했다. 남자들은? 어리거나 늙었거나 같은 잣대로 평가받는 법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자를 들고 설치는 쪽이었다.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 같은 거야. 25를 넘으면 값이 떨어져.” “서른 넘기 전에 시집가야지. 30대 되면 재취 자리밖에 안 들어와.” 지금 같으면 인사 팀에 바로 신고할 만한 문제 발언이지만 실제로 내가 일하면서 중년 남성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이다.  
 
연말을 맞아 온라인 서점마다 진행 중인 ‘올해의 책’ 투표에서 박막례 크리에이터(이하 ‘막례쓰’)의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가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 70대 여성의 이야기가 용기와 영감을 주는 건 단지 유튜브 스타이기 때문은 아니다. 40년대생인 막례쓰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무책임한 남편을 비롯해 여러 사람과의 인연에서 고통받기도 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사기도 당했다. 하지만 자신의 일에서 성과를 냈고(식당 운영에 성공해 건물주가 됐다). 70대에 시작한 새로운 일에서는 더 큰 성공을 거뒀다(구독자 수 113만을 넘었으며 구글 창립자, 유튜브 CEO를 만났다. 그것도 먼저 제안을 받고해서!). 널리 알려진 대로 ‘코리안 그랜마’ 채널의 출발은 막례쓰가 받은 치매 초기 진단이었다. 손녀인 김유라 PD가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치매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여행을 하고, 그 영상을 편집해 올린 것이다. 이 스토리를 접할 때마다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라는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물론 이것이 보편적인 70대 인생은 아닐 거다. 하지만 40년 넘게 존재해 보니 여자의 인생에 이상적인 나이가 있고, 그 시점을 지나면 점점 하향 곡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알겠다. 특정 나이에 뭔가 이루지 못했다는 점보다 오히려 그 나이에는 이래저래 해야 한다는 남들 이야기에 눈치를 보고 위축된 것이 후회된다.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어지는 것? 어리다고 얕잡아보거나 귀찮게 들러붙는 놈팽이들이 없어져서 얼마나 쾌적한지 모른다.
40대가 ‘좋다’고 말할 때 꽃길만 걷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경험이 쌓일수록 마냥 낙관적이기도 어렵다. 다만 성년이 된 이후 경험을 통해 축적된, 나와 세상에 관한 빅 데이터에서 힘을 얻는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더 잘 알게 되며, 남들 눈치를 덜 보면서 원하는 걸 명확하게 추구할 수 있다. 예상 밖의 나쁜 일도 겪었기에 세상이나 타인에 대해 포용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유연하게 대처할 여유와 회복력이 생긴다. 내가 쌓아온 업무의 전문 영역과 네트워크 속에서 잘할 수 있는 일들의 감각이 더욱 단단해진다. 앞으로도 더 넓은 세상에서,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내년이, 다가올 50대가 기대된다. 같이 여행 다니며 새로운 경험을 자꾸만 권해줄 딸이나 손녀가 없다는 건 좀 허전하겠지만.
 
황선우는 작가이자 운동 애호가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썼으며,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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