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차에 빠진 이유

어떤 시절의 어떤 인연은 시의적절하게 찾아온다. 요즘 내 시절 인연은 ‘차(茶)’가 아닌가 싶다. 좋아한다는 것. 모든 것이 그로부터 시작된다는 게 놀랍다. 최근까지 차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커피 애호가를 넘어 커피 중독자다. 과테말라나 에티오피아 계열의 산미 있는 커피콩을 선호한다. 라테에는 무조건 원 샷이나 투 샷 추가. 하루에 두 잔에서 많게는 다섯 잔 정도 커피를 마신다. 카페인에 내성이라도 생긴 건지 자기 전에 마셔도 잘 잔다. 대신 하루라도 커피를 안 마시면 온종일 두통에 시달린다. 줄곧 멍하고 시야가 흐릿하다. 불현듯 내 하루가 커피 따위에 휘둘린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루가 계속되면 인생 전체가 될 것이므로. 커피를 끊, 아니 줄여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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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늘 현실을 불러들인다. 그즈음 선물로 차를 선물받았다. 그것도 세 명의 지인에게서. 한 사람은 스미스 티 박스, 다른 사람은 에디션 덴마크 티 세트. 세 번째 지인은 런던 해로즈백화점에서 사온 얼 그레이를 기념품으로 주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현실에서 알고리즘이 터진 상황. 때마침 내게 도착한 일련의 차들이 차에 대해 일천한 나에게 차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스미스의 녹차 티백은 차의 풍미를 알게 해줬다. 내가 알던 티백들은 차도 아니었다. 프리미엄 버전이란 말도 부족하다. 생기발랄한 녹차 향과 혀에서 톡톡 튀어 오르는 신맛, 비강으로 퍼지는 구수한 미각의 향연. 티백에서 이런 맛이 날 정도면 진짜 귀한 녹차는 대체 어떤 맛일까? 에디션 덴마크의 티는 허브티였다. 가루로 된 차를 우려먹을 수 있는 주전자가 동봉돼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찻잔 위로 듬성듬성 떠오른 마른 꽃이 기분을 화사하게 만들었다. 해로즈백화점의 얼 그레이는 밀크 티로 마셨다. 갓 우러난 홍차에는 아침 햇살처럼 ‘쨍글쨍글한’ 향기가 났다.


주방 선반에 갑자기 늘어난 차를 다 마시기도 전에 ‘다도 체험’을 하게 됐다. 이 역시 우연한 기회였다. 우리나라의 차 역사는 삼국시대 말부터 현재에까지 이른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함께 번성했고, 조선시대에는 사찰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조선 말기 승려 초의선사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하며 차의 부흥을 일으킨 인물이다. 다선일미(茶選一味), 차를 마시는 행위 자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을 돌아보는 수행이라는 차 정신을 남겼다. 대표 저서로 <동다송>이라는 책이 있다. 일본의 차는 다도와 미학을, 중국의 차는 품종과 제다법을, 한국의 차는 맑고 향기로운 정신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찻자리를 정돈하고 바른 자세로 앉아 다구의 용어와 사용법을 배웠다. 따뜻한 물로 다관(찻주전자)과 잔을 데우고 찻잎을 다관에 넣어 우린다. 기다리는 과정과 차를 공평하게 나누는 일, 상대방에게 차 한 잔을 건네는 모든 과정이 수행처럼 느껴졌다. 차의 맛보다 차의 예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차담 속에서 치유를 맛봤다. 차를 내주는 일은 마음을 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차가 점점 좋아졌다. 내 삶에 차를 위한 자리를 조금 내주고 생긴 마음이다. 차, 차, 차 하고 다니다 보니 찻자리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녀는 거실의 한 귀퉁이를 차실로 쓰고 있었다. 하루의 일부를 혼자만의 시간으로 만들어 일과처럼 차를 마신다고 했다. 작은 테이블에 큰 나무 차반이 있었다. 찻잔을 채우는 귀여운 사이즈의 물주전자는 ‘자사호’라는 보이차 전용 다관이라고 했다. 타이베이에서 사왔다는 멋스러운 찻잔 옆엔 도자기로 된 인형도 있었다. 사슴 하나, 개구리 하나.


“이건 뭐예요?” “내가 기르는 애들이야. ‘차총(茶寵)’이라고 부르는데, 말 그대로 ‘차의 총애를 받는 존재’야. 차반 위에 앉아 내가 차 마시는 걸 지켜보지. 있는 것과 없는 게 또 다르다? 이젠 없으면 좀 허전해. 남은 차를 얘네들에게 부어줘. 차 샤워를 할 때마다 색과 윤기가 배. 그렇게 나만의 존재로 길들이는 거지. 처음엔 그냥 차 장식품으로 존재하지만, 나중엔 꽤 소중하고 든든한 존재가 돼. 그러고 보면 내가 얘네들에게 길들여지는 것 같기도 하고.” 차를 마신다는 것, 꽤 귀여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차와 관련된 도구를 검색해 봤다.


내게 맞는 차를 찾으러 찻집에 갔다. 물어볼 게 많아 혼자 갔다. 반려 차총을 기르는 지인에게 종로에 있는 찻집을 소개받았다. 생차와 숙차를 섞은 보이차 → 숙차→ 생차 순으로 경험했다. 세 가지 차를 마시는 데 90분이 걸렸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된 시간이었다. 보이차는 중국 운남성의 대엽종 차엽을 원료로 한 지역 특산물이라는 것, 30년 이상은 돼야 좋은 차가 된다는 것, 그 오랜 시간을 기다릴 수 없어 숙차라는 보이차가 개발됐다는 것, 따라서 숙차보다 생차가 더 오래됐거나 값어치가 높을 수 있다는 것, 자사호 역시 중국의 이싱 지역에서만 생산된다는 것, 이 지역 고유의 광물로 자사호를 만든다는 것, 자사호로 우려낸 보이차가 더 맛있다는 것. 빈티지마다, 만들어진 방법에 따라, 자사호와 찻잔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보이차는 평생 마셔도 알 수 없을 것 같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매번 모습을 바꾸는 파도처럼, 한순간도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 불꽃처럼.


조계사 스님과 차담을 예약해 두었다. 그 이야기를 여기 쓰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4시간이 걸려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는 극강의 일본 다도도 궁금하다. 티 트립(Tea Trip)을 계획해봐야겠다. 차 오마카세 카페도 가볼 예정이다. 아직 만나지 못한 인생 차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고가여서 장바구니에만 넣어둔 차 도구들은 언제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과연 커피와의 이별은 가능할는지. 이제 차의 세계에 발가락만 담갔을 뿐인 나에게 펼쳐질 세상이 기대된다. 차의 알고리즘이 불러들일 새로운 인연과 이야기에 설렌다. 한 마리의 잘 길들여진 차총으로 거듭나고 싶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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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진

세상은 ‘덕후’들이 만듭니다. 과몰입 전문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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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전혜진
  • 글 나정원
  • 아트 디자이너 정혜림
  • 디지털 디자이너 석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