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팅 없는 관계 연습
올여름이 시작될 무렵, 엄마와 각자 기차를 타고 묵호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경기도에, 엄마는 부산에 거주 중이니 그 편이 여러모로 합리적일 것 같았다. “같이 기차 타고 가면서 창밖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래야지. 따로 가는 게 무슨 여행이야.” 딸 없이 홀로 긴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묵호까지 가는 게 심심할 것 같다고, 엄마는 출발하기 전 통화에서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막상 묵호역에서 마주한 엄마의 얼굴은 어쩐지 약간 상기돼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옆자리에 앉은 아가씨랑 얘기 많이 했다.” 모르는 사람이랑 대화를 나눴다고? 심지어 엄마보다 젊은 사람이랑? 기차든 버스든 지하철이든 옆에 앉은 사람과 대화하기는커녕 내 몸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닿을까 봐 최대한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여 앉는 나로서는 엄마의 행동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엄마 가방에 간식이 있길래 아가씨한테도 하나 줬는데, 고맙다고 하길래 계속 말을 이어가게 되더라고. 알고 보니까 출판사에서 일한다 하고,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다는 거야. 연락처도 교환했다. 다음에 동네에서 밥 한번 같이 먹어야지.” 엄마는 자신과 나이 차도 많은 데다 기차를 타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을 잠재적 친구로 만든 셈이었다. 부산에서 묵호로 이동하는 단 세 시간 만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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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달라도 너무 다른 나는 친구를 만들려면 돈과 시간을 써야 한다. 물론 어떤 친구든 돈이나 시간이라는 자원이 투입되지 않는 관계는 드물다(예를 들어 친구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친구와 고민 중인 주제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려면? 쫓기지 않을 만큼의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어떤 관계는 돈과 시간을 써야만 시작된다. 그게 요즘 유행 중인 ‘커뮤니티’다. 70대인 우리 엄마보다 젊은 세대, 특히 30~40대는 이미 누군가 만들어놓은 커뮤니티에 돈을 내고 입장해 독서부터 커리어 계발, 각종 취미활동 등을 한다. 매일 반복되는 관계에서 살짝 벗어나보고 싶고, 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고, 그런데 새로운 사람을 어디서 만나야 할지는 모르겠고, 기왕 누군가를 만날 거라면 나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졌거나 가치관이 유사했으면 좋겠고, 하지만 사람을 모으고 모임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쓰는 건 너무 힘드니까, 어떤 사람들은 돈을 내면서 커뮤니티에 간다. 사실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형성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상대방이 나와 맞을지 안 맞을지 알 수 없고,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미지수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만, 아무나 만나고 싶지는 않아! 사람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싶어! 그래서 모두 느슨한 관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관계, 언제든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관계가 좋다면서 커뮤니티를, 정확히는 커뮤니티 ‘서비스’를 찾는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관계 맺는 방식에 익숙하다. 오늘 아침 먹은 음식, 여름휴가에 한 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좌절과 기쁨 등 한 사람의 사적 영역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기분을 느끼며 온라인으로 금세 친밀감을 느꼈다가, 조금이라도 나를 실망하게 하는 발언 혹은 행동을 하거나 더 이상 내게 쓸모 없다고 여겨지면 쉽게 ‘언팔로’를 하고, 구독도 취소한다. 온라인에서는 서로 관계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내가 누군가를 더 이상 팔로하지 않기로 결정하거나, 누군가 인스타그램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그 사실을 알기 어렵다. 도미닉 페트먼은 <고스팅>에서 이런 것을 ‘고스팅(Ghosting)’, 즉 어떤 관계에서 이유나 예고 없이 갑자기 사라지는 행동이라며 (사람이 사람을) 떠날 때의 울퉁불퉁한 홈이 기술에 의해 매끄러워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각자의 삶에 쉽게 들고 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고 했다. <고스팅>을 읽으며 생각했다. 그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타인과 관계를 시작하는 것, 유지하는 것, 끝내는 것이 모두 껄끄러워지고 그 과정에서 요철이나 마찰 같은 걸 견딜 수 없게 될 것 같다고. 그래서 우리는 관계에 따르는 육체적 · 정신적 노동을 부분적으로 대리할 수 있는 커뮤니티 서비스를 이용하고, 내가 남을 고스팅하거나 남이 나를 고스팅해도 ‘느슨한 관계’였으니 별 타격감을 느끼지 않는다지만, 알고 보면 그것이 각자의 삶에 지속적으로 상처를 입힐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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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이전에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새롭게 관계 맺기를 시도 중이다. 첫 번째로, 지난 6월부터 한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동네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내가 익숙하게 만나온 나이대가 아닌, 60대 이상의 회원들이 모인다. 이 모임은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여러 활동을 함께 한다. 6월에는 오이소박이를 담갔고, 7월에는 칭찬 일기를 썼다. 나와 경험도, 삶의 단계도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즐거워서 조만간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언니’들과 호프집에서 번개 모임을 하기로 했다. 두 번째로, 슈퍼스톰이라는 비영리단체이자 커뮤니티에서 활동 중이다. 개인이 살면서 느끼는 혼란스러움을 사회운동으로 바꾸기 위해 모인 이 단체는 다양한 일을 하는,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슈퍼스톰에서 활동하며 내게 익숙하지 않은 방식을 시도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달라지기 위해, 나의 바깥으로 계속 나가보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 맺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달라지기, 나에게만 갇혀 있지 않기, 이런 건 혼자 해낼 수 없는 일들이다.
가끔 내가 너무 많은 관계 속에 있다는 게 피곤하다. 모임 같은 건 왜 해서 사람 만나는 데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나. 그럴 때면 온라인으로 도망치고 싶다. 언제든 타인에게 쉽게 말을 걸 수 있고, 언제든 물러날 수도 있는 세상에만 존재하고 싶다. 나도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들을 ‘고스팅’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어떤 관계가 무겁게 느껴진다는 건 그 관계에 내가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얼굴과 이름, 삶의 일부를 알게 된 이상 나는 그와의 관계를 시작하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끊어버릴 수 없고, 관계를 이어가거나 제대로 마무리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감정, 노동을 써야 할 것이다. 힘든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진 않다. 나는 내가 속한 관계, 나아가 세상에 책임이 있다.
Writer
황효진
책부터 팟캐스트까지 세심하고 다정한 시각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고, 때때로 실패하며 배우는 기획자이자 작가. 건강하게 일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 ‘뉴그라운드’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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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전혜진
- 글 황효진
- 아트 디자이너 이아람
- 디지털 디자이너 석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