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페미니즘 재밌었고
“왜 페미니즘 얘기만 하느냐?”는 질문을 영원히 듣고 있다. 페미니즘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말이다. 초창기부터 들어온 이 질문의 답은 간단하다. “그러려고 만든 출판사이기 때문”이다. 2016년, 이른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계기로 첫 책을 낸 봄알람은 굳세게 페미니즘 이야기만 하면서 10주년을 맞았다. 31권의 책을 냈고 북 페어에도 여러 번 참가했다. 책은 사상 최고로 멋진 물건이지만 단점이 있다면 무겁다는 거다. 이 무거운 책더미를 이고 지고 팔러 다니는 이유 역시 간단하다. 페미니즘 책만 쌓아 놓고 앉아서 ‘우리는 페미니즘 얘기만 합니다’라고 외치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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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에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렸다. 원래도 국내 최대 규모 도서전이지만 해마다 인기가 높아진다. 봄알람은 2022년에 처음 참가해 매년 참가 중이다. 크고 작은 북 페어들이 다 그렇지만, 책을 좋아해서 책 잔치에 온 사람들로 거대한 공간이 북적이는 장면은 출판인의 영혼에 보약이 된다. 독자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으면 책을 내는 건 불가능하다. 이 믿음이 약해질 때는 도서전을 처방한다. 독자가 이만큼 있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각종 책을 만드는 동지들도 이만큼이나 있다.
여자의 영혼에는 페미니즘이 보약이다. 봄알람(Baume a l’ame)이 그 뜻이다. 실제로 페미니즘에 관해 배우고 읽기 시작한 뒤 나는 치료받은 기분을 느꼈고, 그런 책들을 내고 있다. 여성을 ‘제2의 성’이 아닌 기본형 인간으로 삼은 말과 글은 우리를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데려다준다. 여성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한다. 성차별 사회에서 여성들이 ‘내 마음’을 챙기며 살아갈 수 있으려면 페미니즘 지식은 필수다. 그래서 페미니즘 책만 만들어 판 세월이 벌써 10주년! 모처럼 기념하기로 했다.
‘도서전+페미니즘’이라면 내겐 좋은 것 더하기 좋은 것, ‘파워 힐링 피톤치드 러브 앤 피스’ 같은 거다. 도서전에 오는 페미니스트 독자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서 올해는 벽을 만들었다. 부스 한쪽 면에 ‘페미니즘 출판사 10주년 타임라인’을 그려두고 그 시간의 선 위에 방문자들이 메시지를 붙이는 참여형 전시다. 2016년부터 2026년까지 차례로 전시 내용을 정리하고 보니, 새삼 봄알람이 책으로 다룬 주제들은 동시대 여성의 투쟁 키워드이기도 했다. 페미니즘 교육, 여성 폭력 가시화, 성별임금격차 이슈 파이팅, 낙태죄 폐지운동, 디지털 성범죄 규탄, 반성매매운동, 가부장제 격파 행동, 직장 내 성차별과 성착취 근절 등등. 책과 코멘트, 시기별 요약을 붙인 벽면에 5일간 찾아온 방문자들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벽에 쓰인 시간을 읽으며 일행끼리 대화를 시작하는 일도 많았다.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로 가득 찬 벽 앞에서 수다를 떨고 웃으며 서로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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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해 둔 ‘페미 각성’ 스티커에 본인의 이름을 적었는데 어디에 붙여야 할지, 벽 앞에서 서성이던 독자가 끝내 결정하지 못하고 다른 편에서 책을 구경하던 일행을 데려와 “나 언제 각성했어?”라고 묻는다. 어느 부분이 헷갈리는 건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방문자가 많아 묻지 못했다. 내가 한쪽에서 책을 파는 사이 그는 일행들과 신중하게 토의하더니 어딘가에 자신의 각성 선언을 남기고 떠났다. 그런 모습들, 나는 미처 알 수 없는 망설임과 즐거움을 눈에 담으면서 5일간의 도서전이 막을 내렸다. 매일 아침, 책을 지고 출근해 부스에 조명을 켜면, 가장 먼저 벽면을 바라봤다. 벽은 계속 모습을 바꿨고 점점 가득 찼다. 봄알람의 10년은 동시대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채운 것이고 벽은 그 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기획 의도였으나 벽은 의도를 훨훨 뛰어넘었다. 무더위와 인파를 불사하고 소규모 출판사 부스까지 찾아온 많은 사람의 발길과 손길에 생각과 마음까지 담겼으니 말이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웃길까? 너무 좋다.
봄알람을 운영하는 나와 디자이너 우유니는 기질상 ‘제스처’에 재능이 없다. 뭔가를 기념하고 이야기로 만들고 팡파레 부는 성격도 아니다. 봄알람 10주년을 나름 성대하게 자축한 건 노력의 결과다. 둘 다 생일 안 챙기는 타입인데 봄알람 생일은 다르다. 우리가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기겠는가? 우리에겐 페미니즘 외길로 열 돌을 맞은 봄알람 씨를 위해 기록하고 축하할 의무가 있다. 전시를 열고 사람들의 손길을 청했다. 그간의 여정을 담은 10주년 기념 책과 스티커 한 상 차림도 만들었다. 기념 책의 제목은 <10년간 페미니즘 재밌었고>. 봄알람 씨, 열 돌을 축하합니다. 나는 내 삶을 통째로 회의하는 순간에도 당신만은 소중하게 생각한답니다.
Writer
이두루
출판사 ‘봄알람’ 대표. 베스트셀러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 이슈를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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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전혜진
- 글 이두루
- 사진 unsplash
- 아트 디자이너 이아람
- 디지털 디자이너 석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