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법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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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할 때가 있다. 대단한 애정에서 비롯된 건 아닐 것이다. 그저 갈림길 앞에서 어디로 발을 디뎌야 할지 모를 때, 나만 길을 잃은 건 아닐 거라는 치졸한 위안을 얻고 싶을 때 그렇다. 내 선택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기고 싶을 땐 필사적으로 누군가의 발자취를 찾게 된다. 여기에서 어디로 가는 게 더 나은지, 멈추는 게 이득일지, 걸으면서도 생각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길 같은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헤매다 보면 사는 게 뭐라고 매 순간 이런 불안에 휩싸여야 하는가 싶다. 그러고 보면 작가 사노 요코는 제목 하나는 잘 지었다. <사는 게 뭐라고>라니. 나도 그렇게 초연해지고 싶다고 칭얼거리며 이 지겨운 불안이 정녕 나에게서 비롯된 건지 자문한다. 아무튼 그럴 때마다 활자 속에 있는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이런 치사한 욕구가 어디서 오는 건지 가늠해 보면 보통 팍팍할 때 그렇다. 내 인생이 영 별로인 것 같을 때 그렇다. 세상이 나에게 문제집을 쥐여줬는데 힌트 페이지가 홀랑 찢겨 있다는 걸 알았다면 다른 사람의 답안지라도 슬쩍 볼 수 있는 거지 뭐. 꼭 정답이 아니어도 된다. 언제나 인간은 오답을 밟고 일어선다. 그래도 이왕이면 정답이면 좋겠지만.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14년 차가 됐다. 숫자는 생각보다 무겁고 잔인하다. 한 분야에 10년 넘게 발을 담갔다면 디딜 만한 것 하나쯤은 생겨야 하지 않나? 10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생각해 보면 맨 먼저 강산이 떠오른다. 하지만 매일 그 짓을 하고 있다 보니 강산이 변하는지, 심지어 저것이 강산이었는지 헷갈릴 지경이 됐다. 뭐든 지겹도록 바라보고 있으면 감각이 무뎌지는 법이다. 슬럼프도 결국 반복 또는 지루함의 근사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강산은 변하고도 남았고, 그 사실이 무색할 만큼 내 발밑은 여전히 오싹할 정도로 허술한 것 같다.


내가 가장 오래 붙잡고 있던 건 이전엔 아쟁을 켜는 일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시작해 대학원을 휴학할 때까지. 그때도 그랬다. 매일 커다란 아쟁을 메고 연습실과 레슨실을 오가며 선생님이 내는 소리를 똑같이 흉내 내려고 애썼다. 어떤 날엔 좀 괜찮다 싶다가도 다음날에는 형편없는 소리가 나를 절망케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학교 간판을 준다기에 시작했는데 미운 정이 드니 더 잘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종종 나를 힘들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쟁을 할 때와 달라진 점은 이 일이 정말 ‘직업’이 됐다는 거다. 하지만 직업 아닌 이 직업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기약 없는 순간을 기다리며 나이를 먹거나, 매번 적금을 들었다 깰 때, 세상 사람들이 안정 궤도에 안착하는 걸 구경할 때마다 그렇다. 하고 싶은 마음과 실제로 내가 놓인 현실이 굉음을 내며 부딪힐 때마다 어딘가 금이 가는 기분. 그래서일까.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은 대개 미움을 동반한다. 마음을 쏟는 만큼 돌려주지 않는 대상을 미워하거나, 다 알면서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나를 미워하거나. 그런 순간마다 되묻는다. 더 갈까? 멈출까? 언제까지 이 짓을 하며 살 수 있는 거지? 10년 동안 아쟁을 좋아하고 미워했다. 그리고 결국 미련 없이 그만뒀다. 도망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리고 연기를 하는 지금의 나는 또 그런 끝장이 날까 봐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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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무겁게 끌면서 들어간 카페에 앉아 책장을 ‘휘리릭’ 넘긴다. 친구가 정성스럽게 내려준 차이(Chai)를 한 모금 마시며 살만큼 산 노작가의 자조적인 위트에 낄낄거리다 이런 여유가 그냥 산다고 주어지는 건 아닐 것 같아 이내 풀이 죽는다. 모든 것에 삐딱한 작가의 시선을 샅샅이 뜯어보면 스쳐 지나가는 걸 허투루 흘리지 않는, 나이 듦과는 무관한 호기심이 느껴진다. 그런 호기심이 세상을 통과해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 같다. 고개를 들고 세상을 두리번거리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세상에 대한 애정일까?


애정과 사랑, 인류애 등의 단어는 필요 이상으로 거창하고 막연하다. 차라리 미련이라면 좀 낫게 느껴진다. 가끔 별로인 삶이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미련, 재미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겠다는 오기 어린 심보, 무력감에 지지 않으려는 의지 따위가 세상을 똑바로 보게 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 잠시 내 발밑을 본다. 생각해 보면 그런 순간과 자주 마주쳤다. 정답이 아니라 해도 기어이 살아내는 사람들을. 신나는 퍼레이드 옆에서 오만상을 쓰며 북을 치는 슬픈 사람들과 차별을 공약으로 앞세운 현수막을 비웃음으로 비벼보며 세상에 계속 새치기당하는 존재들을. 세상이 거대한 오답 노트를 가지고 잘난 척하는 걸 볼 때마다 질기고 퍽퍽한 표정의 주변 친구들이 생각난다. 어떻게든 세상을 똑바로 보려는 눈빛은 형형하다. 나도 종종 그들의 삶에 올라타곤 했다. 그들이 만든 세계에서 만난 인물들은 때로는 너무 바보 같아서 귀엽고, 미련해서 미웠다. 누군가 밤새 고쳐 쓴 시나리오 속에, 쥐어짜낸 문장 틈 사이에, 차가운 거리에서 온몸으로 무언가를 지켜내려는 미련한 존재들의 삶에 나를 덧댈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러니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책장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주위가 어두워졌다. 또다시 갈림길이 보이지만 이번엔 귀엽고 다정한 위안이 내 등을 밀어주는 것 같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간다.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은 하루가 시작되겠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을 통과한 누군가의 끈질긴 시선이 언젠가 미련한 이야기로 변모해 나에게 오길 바랄 뿐이다. 나도 계속 안부를 물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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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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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전혜진
  • 글 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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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트 디자이너 김민정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