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힘을 내세요!”
내 귀에 응원을 불어넣는 의문의 남성 목소리. 결혼해 새 식구가 생긴 지 6개월 차가 됐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남편이 아니다. 다름아닌 러닝 앱 트레이너. 여전히 서울과 김제, 왕복 500km를 적으면 일주일에 한 번, 많으면 두 번씩 오가며 주말 부부 아닌 주말 부부처럼 살아가는 나에게 ‘결혼이란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다 문득 새로 친해지기 시작한 러닝 앱이 떠올랐다. 숨이 가빠지는 그 기분을 느끼기 위해 스스로 몸을 일으켜 움직이다니,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생각도 못하던 일이다. 오늘만 살고 싶어서, 오늘이라도 제대로 살아내는 게 삶의 목표였던 나에게 건강하게 내일이 왔으면 하는 바람을 느끼게 하는 동반자. 서른다섯, 내 삶은 비로소 초여름을 맞이한 기분이다.
정말 번뜩,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오랜 인연의 그가 궁금해졌다. 김제평야에서 시골집을 고쳐 산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대학에서 만난 오랜 후배였고, 내성적인 성격과는 일관성이 없게 문득 내게 안부를 물어보던 그는 너무나 선해서, 평범한 일상을 맘껏 누릴 수 있는 좋은 사람 같아 보여서 감히 만날 생각조차 못했다. 그런데 도시생활에 지쳐 시골에 내려가 아침저녁으로 드넓은 평야를 만나다 보니 어느새 깨달음이라도 얻은 건지 갑자기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나는 그를 내가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10년 동안 줄기차게 좋아한다고 했는데, 왜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에이, 설마 하며 밀어냈을까. 하다못해 그간 온갖 이상한 사람들에게는 쉽게 애정을 허락했던 주제에.’ 가을밤, 뜬금없는 생각이 반가웠다. 어쩌면 바닥을 치던 자존감이 회복됐다는 신호 같았다. ‘드디어 내가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구나!’ 그리고 이전 연애들이 왜 대차게 실패의 연속이었는지도 깨달았다. 내가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지금껏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을 골라 만나기보다 이런 나라도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에게 애정을 구해왔구나.
그래서 그 모든 연애가 괴로웠구나….
그렇다. 시골살이는 이런 깨달음도 가져다준다. 계절에 맞는 음식을 먹고, 좋은 풍경을 보고 여유롭게 한숨을 돌리는 법을 알게 된 것을 넘어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게 해주고, 이 평야는 이렇게까지 나를 건강하게 해주었다. 한달음에 서울에 가 그 훌륭한 남자에게 만난 지 2주 만에 프러포즈까지 해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의 아내가 돼 서른다섯의 초여름을 맞고 있다. 비로소 내가 앉아 있는 이 테이블 주변을 살핀다. 애써 평범한 건 싫다고 무시해 왔던, 하지만 속으로는 간절히 원했던 평범하고 건강한 삶이 나에게 와닿아 있음을.

너무 좋게만 말하는 것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른다.막 달리기를 시작했고, 계절은 막 초여름에 진입하고 있다. 어쩌면 곧 ‘아유, 너무 덥다. 힘들어 죽겠네’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나. 달리기는 이미 시작됐고, 이게 내 삶을 건강하게 하는 시도라는 걸 알게 된 것 만으로도 지금의 나는 행복하다. 에어팟에서 다시 응원 소리가 들린다.
“아주 잘했어요!”
최별
MBC 프로듀서. 서른둘이 되던 해, 김제의 115년 된 폐가를 덜컥 산 뒤 유튜브 ‘오느른’을 통해 시골살이 브이로그를 올렸다. 2년간의 시골살이를 마치고 현재는 도시와 시골을 사는 삶의 이야기를 잇기 위해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