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운동코치 에리카가 힙합을 좋아하게 된 이유

'여자어'에서 벗어나 솔직하고 명확한 언어로.

You know what I’m saying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자리에 앉은 이후, 알맞은 배경음악을 고르는 데 24분을 허비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어떤 음악을 들으며 글을 썼는지 독자는 알 수가 없다. 이 글을 읽을 때 배경음악이 함께 들리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적절한(뭔지 모르겠지만)’ 음악을 골라야 글을 시작할 수 있다는 핑계로, 나는 열등품을 깨부수는 도자기 장인의 마음으로 ‘이건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라며 다음 곡으로 넘어갈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음악업계 종사자이거나 음악 애호가도 아니다. 항상 음악이 흐르기는 하지만, 내가 운영하는 사업장은 근력운동을 메인으로 하는 여성 전용 체육관과 지극히 건전한 여성 전용 칵테일 바다. 굳이 내 음악적 취향을 말한다면 편견 없이 바운더리가 넓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아무거나 다 듣는 ‘막귀’에 가깝다. 그럼에도 체육관 수업이든, 칵테일 바 영업이든, 글이든 뭔가 제대로 시작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변수는 언제나 음악이었다.
 
지금은 나이를 꽤 먹어서 나름의 기호가 정립됐지만 어릴 때는 뭐든지 빨아들일 준비가 된 스펀지 그 자체였다. 얽히고설켜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몰랐던 20여 년 전, 나는 당시 최신식 mp3였던 아이리버 프리즘을 친구들에게 돌아가며 맡겼다. 뭐가 됐든 네가 평소에 듣는 노래로 채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mp3를 돌려받으면 한두 달 내내 그의 취향에 코를, 아니 귀를 박고 있다가 또 다른 친구에게, 가끔은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이들에게 다시 mp3를 맡겼다. 그래서 나는 몇 달간은 로커로, 다음 몇 달간은 발라더로, 또 다른 몇 달간은 재즈 디바로 살 수 있었다.
 
의외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힙합 키드로 살던 시절이다. 언더그라운드 신에서 형들과 믹스테이프를 만드느라 수업시간에 잘 졸던 국문과 동기 남자애가 꽤 오랫동안 내 mp3를 채워주었다. 같이 듣던 시 창작 수업 발표 시간에 철학과 친구를 데려와 비트 박스를 시키고, 프리스타일의 랩을 해서 수염이 지긋한 교수님을 감동시킨 적도 있었다. 그 애를 통해 알게 된 힙합, 그 직설적이고 원초적인 가사라니. 시도 때도 없는 추임새 ‘유노와람쌩(You Know What I’m Saying)’에 완전히 꽂혀버렸다. 
 
에둘러 예쁘게 말하는, 이중 삼중으로 쿠션을 깔고 조심스럽게 내 주장을 ‘부탁’하는 ‘여자어(語)’를 미덕으로 여기던 시절, 숨 쉬는 마디마디마다 욕을 섞어가며 유남쌩을 외치는 힙합은 완전히 새로운 언어였다. 
 
‘귀 열고 들어, 닥치고 새겨, 그냥 내 말 들어, 왜냐면 나는 최고고 내 말이 다 맞으니까’가 주를 이루는, 어찌 보면 생떼에 그 말들보다 강력한 프로파간다를 여태 보지 못했다. 그야말로 날것의 아우성이었다. 타이거JK가 “꿈의 눈물로 땀으로 적도보다 뜨거운 열기로 시간과 공간도 가두지 못하는 혈기로 소외된 모두 왼발을 한 보 앞으로”라며 내 고막에 외쳤다. “중요한 건 자신을 똑바로 밝히는 것” 그리고 “우습게 무지 속의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라고 YDG가 그랬다. 당시 성균관대 영문학과 학생으로 알려져 있던 스윙스는 “이제 잘난 내가 등장했으니까 낯선 애들은 겟 패밀리어(Get Familiar) 하는 게 좋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일갈이, 밑도 끝도 없는 의기양양함이 나쁘지 않았다.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감히 요구할 수 없었던 온전한 공감을 갈구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깊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인간은 누구나 이해받길 원한다. 고도로 사회적인 동물인 동시에 불행히도 고도로 개별성을 가진 동물이다. 따라서 모두 고유하길 바라면서 고유한 내가 온전히 자신으로서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그대가 변해서, 그래서 변하지 않는 나와 합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비록 내 마음은 네 마음 같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네 마음이 내 마음과 같기를. 내가 느끼는 걸 너도 느끼기를.
 
언어보다 노래가 먼저 탄생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뭐든 더 간절한 쪽이 먼저였으리라. 짝을 향해 지저귀는 새들과 낯선 것에 짖어대는 개들처럼 뭔가 북받쳐 토해낸 것이 인류 최초의 노래가 아니었을까. 신생아 때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울어서 호소하던 것을 이제는 괜찮은 척, 능숙한 척 잘 숨겨왔을 뿐. ‘온전한 이해’의 결핍과 불안을 그때는 힙합이 대신 부르짖어주는 것 같았다. 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 내 마음 알아? 알아듣냐고! 
 
‘이해하다(Understand)’는 Under와 Stand로 이뤄진 단어다. 이해란 상대방의 밑으로 들어가 서보는 것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타당함과 합리성을 따지는 건 분석이다. 분석은 평가지 이해가 아니다. 이해는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노래가 음절과 비트로 쪼개서 파악되는 게 아닌 것처럼. 그저 귀를 열고 들어주기를, 감응해 주기를, 따라 흥얼거리듯 나에게 반향해 주기를, 노래처럼 내 마음도 그렇게 해주기를 모두가 언제나 마음에 품고 산다. You know what I’m saying?
 
에리카
여성 전용 헬스장 샤크짐 공동대표. 사무직 직장인으로 살다가 30대에 완전한 ‘운동인’으로 각성했다. 더 많은 여자가 운동해야 한다는 믿음하에 〈떼인 근력 찾아드립니다〉를 펴냈다. 역시나 여성 전용 바 ‘에리카’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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