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소설가는 어디에서 글을 쓸까? 호텔이 베이스캠프가 된 사연

소설가 김초엽이 적극적인 호텔방랑자가 된 이유 #호캉스 아님

호텔과 작가의 비즈니스
 
예전에는 소설가가 이렇게 방랑하는 직업인 줄 몰랐다. 끊임없는 강연과 미팅, 인터뷰 일정의 한가운데에서 든 생각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순천의 한 호텔에 있다. 이틀 전에는 여수의 호텔이었고, 다음주에는 서울과 강릉의 호텔에 있을 예정이다. 10월 일정을 살펴보니 울산 집과 작업실에 머무는 기간보다 타지의 호텔에 머무는 기간이 더 길다. ‘호텔 방랑자’가 된 셈이다. 물론 작가들은 필요하다면, 또 그럴 수 있다면 골방을 고집한다. 내가 아는 작가 중에는 강연이나 인터뷰 대부분을 거절하는 이도 있고, 글쓰기에 집중할 때는 외부 일정을 일절 받지 않는 이도 많다. 나도 긴 원고를 쓸 때는 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작업실로 출퇴근한다. 하지만 일 년에 몇 번씩 이렇게 호텔을 한참 떠도는 시기가 찾아온다. 나는 그런 창작 외의 일에 대해 어디에서 강연을 하고, 언제는 업무 미팅을 하고, 또 어디와 인터뷰가 잡혀 있고 등등 길게 설명하다가 요즘은 그냥 ‘출장’이라고 줄여 말한다. 그 일의 대부분이 어디론가 떠나서 수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때, 그러니까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초기에는 과감하게 당일치기를 자주 했다. 아침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가서 한두 개 일정을 소화하고 다시 KTX를 타고 집으로 온다든지, 시외버스를 타고 대구로 가서 강연하고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온다든지. 그때만 해도 집을 놔두고 굳이 다른 데서 자는 것보다 새벽에 돌아와도 집이 편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생각을 바꾸게 된 건 아이러니하지만 코로나19 때문이다. 코로나19로 KTX와 고속버스 같은 장거리 교통편에서 샌드위치는커녕 물 한 모금도 입에 대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기차에서 긴장감과 피로도가 높아지면서 당일치기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완전히 녹초가 되곤 했다. 온종일 아메리카노만 마시다가 밤 10시쯤 집에 돌아와 첫 끼니를 먹을 때도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아, 정말 못해먹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때부터다. 나의 적극적인 호텔 방랑이 시작된 것은.
 
일을 위해 온갖 호텔을 돌아다니다 보니 나에게 호텔이란 온전한 휴식 공간이라기보다 다음 일을 준비하기 위한 ‘베이스캠프’ 같은 공간이 된 듯하다.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적당한 책상과 등받이가 있는 의자, 스탠드 라이트가 있는지 살핀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호텔이 의외로 많지 않은데, 대부분의 방에 긴 책상은 있지만 벽면에 커다란 거울이 있거나(거울은 필요하지만 내 얼굴을 보며 노트북 작업을 하고 싶지는 않다) 제대로 된 의자 대신 스툴이 놓여 있다. 1층에 편의점이 있는지도 중요한 선택 요인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온 날 밤에 또 일을 해야 하면 편의점에서 다 먹지도 않을 간식을 왕창 사들이는 것으로 마음의 공허를 채우고 싶기 때문이다. 창문이 너무 작거나, 창밖이 건물로 막혀 있거나, 어두운 곳보다 큰 창으로 야경을 어느 정도 내다볼 수 있는 곳이 좋다. 아, 저 사무실 사람들도 이 시간에 일하고 있구나…. 야간 작업자들의 고충을 그 빛을 통해서나마 함께 나눌 수 있으니까.
 
한편 출장만큼 흔하지는 않지만, 오로지 휴식을 위해 호텔을 방문할 때도 있다. 친구를 만나고는 싶고, 어디 맛집이나 카페를 찾아가기에는 역병이 염려스러운 시기에 친구와 단둘이서 호캉스를 떠나곤 했다. 호텔 조식과 클럽 라운지가 포함된, 탁 트인 전망 너머로 바다나 산, 도심 야경이 보이는 값비싼 호텔이 목적지다. 사실 뷔페보다 단품 메뉴가 좋고, 수영할 줄 몰라서 수영장에 들어가도 걸어다니고, 피트니스센터의 최신 운동 기기들을 즐겁게 구경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호텔까지 와서 그것을 할 생각이 없는 나에게, 호캉스란 약간 제값 못하는 휴식 방식이다. 그래도 햇살이 부서지는 바다를 눈앞에 두고 창가 암체어에 앉아 친구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한참 나누다가, 이야기할 거리조차 떨어지면 각자 가져온 책을 조용히 읽는 오후가 되면, 그 여유롭고 사치스러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분명 있었다.
 
일하는 공간이자 휴식 공간인 호텔은 이제 지겹다고 느껴질 때조차 약간 새로움을 품고 있다. 내 집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을 반듯한 침구와 잘 정리된 테이블과 깨끗한 바닥, 언제나 조금씩 달라지는 창밖 풍경 덕분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당면한 마감을 잠시 미뤄두고 다음의 호텔을 신중하게 검색한다. 또 다음 일을 해나갈 에너지를, 나의 ‘베이스캠프’가 산뜻하게 채워지기를 바라며.
 
김초엽 포항공과대학교 생화학 석사 과정을 졸업한 93년생 소설가.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나아갈 수 없다면〉과 첫 장편 〈지구 끝의 온실〉을 펴냈다.  SF 소설,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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