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

세상을 이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맞이하게 되는 고비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고비를 지나는 옆사람에게 나는 어떤 존재가 돼줄 수 있을까요? 씩씩하게 살아남아 함께 멋진 할머니가 된 미래를 그려보며, 〈엘르〉가 여성의 목소리로 세상의 단면을 전합니다. 
에디터 이마루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

 
2021년에는 인생을 좀 덜 낭비하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걸 겁내고 이틀 중 하루는 현관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아야 심신이 안정되는 극도의 내향형 게으름뱅이답게 스마트폰만 붙잡고 시간을 흘려보내던 중, 한국여성의전화 인스타그램에서 ‘분노의 게이지’ 자원활동가 모집 공고를 봤다. 한 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기사를 바탕으로 ‘친밀한 관계’, 즉 전·현 배우자 및 데이트 관계의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 통계를 집계해 발표하는 활동인데, 마침 활동 장소가 ‘온라인(재택)’이었다.
 
줌(ZOOM)으로 집계 방법과 분류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뒤 약 스무 명의 자원활동가들이 각자 담당할 기간을 배정받았다. 나는 11월 마지막 주를 맡았다. 그 기간에 쏟아져 나온 수천 개의 기사 중 친밀한 관계의 남성이 여성을 살해하거나 살인을 시도한 사건, 그 과정에서 여성의 주변인을 해친 사건이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11월 26일에는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50대 남성이 동거 여성을 흉기로 살해한 뒤 고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기사에 따르면 그는 피해자의 ‘확인되지 않는 이성 관계’를 의심해 다툼이 잦았다고 했다. 이튿날에는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30대 남성이 부인을 살해한 뒤 역시 투신자살했다. 부부가 아파트 매입에 필요한 자금 문제로 자주 다퉜다는 주변인의 진술과 함께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엮은 제목의 기사들이 끝없이 쏟아졌다. 한 여성이 끔찍하게 사망했고 가해자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죽음으로 도피해 버렸는데 모두가 아파트값 얘기만 하고 있다니.
 
11월 26일에는 헤어진 여자친구를 스토킹하다 잔혹하게 살해한 20대 군인이 1심에서 3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만기 출소하더라도 50대 초반일 것이다. 11월 27일에는 여자친구에게 쇠망치를 휘두른 30대 남성이 항소심에서 감형됐다. 성범죄 전과가 여럿 있는 그는 전자발찌를 부착한 채 강간, 성매매 강요, 불법촬영, 촬영물 유포 협박, 살해 협박 등을 저질렀다. 자살까지 시도할 만큼 고통받았던 피해자가 엄벌을 탄원했지만 2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행을 반성하는 점 등을 참작했다”며 1심보다 2년 감형한 징역 14년을 선고했다. 궁금했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어야 그런 남자의 ‘반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내가 확인한 것은 1년 중 일주일밖에 안 되는 기간이었다. ‘친밀한 관계’가 아닌 남성, 즉 전 직장 동료라거나 강도가 저지른 여성 살해 사건은 포함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3월 8일 여성의 날,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우리가 조각조각 모은 자료를 다시 검토하고 분석한 최종 통계를 발표했다. 2020년에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최소 97명, 살인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131명이었다. ‘최소’라는 부연이 붙는 이유는 간단하다. 파트너의 폭력에 의한 여성 살해 관련 국가의 공식적 통계가 없다 보니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비교적 구체적으로 보도된 사건만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 통계의 중요한 지점 중 하나는 피해자의 가족이나 친구 등 주변인도 18명이나 살해당했다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 한 사건은 지난해 6월 충남 당진에서 일어났다. 33세 남성 김 모 씨는 여자친구를 살해한 뒤 같은 아파트에 살던 여자친구 언니의 집에 침입해 퇴근하고 돌아오던 피해자를 살해하고 카드와 스마트폰, 차를 훔쳐 도주했다. 피해자들의 아버지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언젠가 감형돼 출소할지 모르는 가해자의 신상 공개를 요구했지만, 다른 100여 명의 가해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전히 그의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한다.
 
“밥을 안 차려줘서” “너무 사랑해서” “자려는데 말을 걸어서” “안 만나줘서” “술을 먹고 들어와서” “늦게 귀가해서” “가정폭력으로 신고해서” “결별 후 다른 남자를 만나서” “여행 가자는 것을 거부해서” “빌린 돈을 돌려달라고 해서” “내연관계가 폭로될 것 같아서” 그 남자들은 그 여자를 죽였거나 죽이려 했다. 2009년부터 2020년까지 최소 1072명의 여성이 이렇게 사망했다. 자원 활동을 마친 지금, 내가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사는 세상이 어떤지 직면할수록 세상을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만은 단단해진다.
 
최지은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하며 글을 썼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딩크 여성들의 삶을 인터뷰한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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