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할머니, 더 뉴 제너레이션!

할머니가 되는 날을 준비하며.

 
 


살면서 맞이하게 되는 고비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고비를 지나는 옆사람에게 나는 어떤 존재가 돼줄 수 있을까요? 씩씩하게 살아남아 함께 멋진 할머니가 된 미래를 그려보며,  〈엘르〉가 여성의 목소리로 세상의 단면을 전합니다. 


에디터 이마루



할머니, 더 뉴 제너레이션!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 않아요!” 
“할머니 같은 게 뭔데?” 
“쿠키도 만들고! 나쁜 말도 안 하고! 남자 팬티도 안 입고!”
 
영화 〈미나리〉에서 데이빗(앨런 김)과 순자(윤여정)가 나누는 대화다. 미국 할머니들을 보며 자라왔을 꼬마는 한국에서 온 할머니에 대한 낯섦과 문화적 이질감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아이가 할 수 있는 투정일 뿐인데 나는 속으로 할머니 편을 들고 있었다. “얘 데이빗아, 너랑 친구랑 다른 것처럼 할머니들도 서로 다 다른 거야. 그리고 너네 할머니가 평생 살면서 얼마나 ‘여자는 이래야 해’ 하는 말을 들어오셨을 텐데 너한테 ‘할머니는 이래야 해’ 소리까지 들어야겠니?” 언젠가 나도 할머니가 될 텐데, ‘진짜 할머니 같은’ 할머니는 절대 아닐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든다.
 
할머니라는 단어를 새삼 들여다본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할머니는 우선 부모의 어머니를 뜻한다고 등재돼 있으며, 마지막 줄에야 ‘친척이 아닌 늙은 여자를 친근하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로 적혀 있다. 여성이 나이 먹어갈수록 세상 속의 자기 자리로 정확히 이름 불리기보다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성 속에 두루뭉술하게 호명된다는 것은 40대를 넘기면서 조금씩 경험해 왔다. 모르는 상대에게 ‘어머님’이나 ‘사모님’ 같은 낯선 호칭들을 들을 때, 자식도 남편도 없는 나는 매번 당황한다(그러니 우리 모두 누구에게나 쓸 수 있는 ‘선생님’ 같은 호칭을 선택하면 어떨까?). 세상에는 나처럼 자녀도 남편도 없으며, 따라서 손자손녀는 더더욱 없는 채로 나이 먹을 여자들이 존재한다. 내 주변의 많은 비혼 여성 또는 결혼했지만 무자녀인 여성들은 ‘Grandmother’는 아닌 채로 ‘Old Lady’가 되어갈 것이다.
 
결혼 안 한 여자들은 나중에 늙고 병들었을 때 혼자 어쩌려고 그러냐는 걱정인지 위협인지 모를 말을 참 많이도 듣는다. 노인 빈곤율이 OECD 가입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나라이기에 노년 이후의 빈곤과 질병, 고독에 대한 두려움에서 누구나 자유롭기 어렵다. 하지만 재활용품 수집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여성 노인들이 과연 결혼을 안 해서 혹은 자녀가 없어서 가난해졌을까? 그보다는 오히려 성장 과정에서는 남자 형제들에게 밀려 교육 기회에서 배제되고, 가사 노동에 집중하느라 직업적 기술을 갖지 못했을 가능성을 떠올리게 된다. 가정에 대한 여성의 공헌은 종종 지워지기에 자신의 몫으로 된 자산 축적도 어려웠을 것이다. 사적 보험 역할을 하는 가족을 만들어두는 일이 결코 여성들의 안락한 노후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보다 필요한 것은 공적인 사회보장제도이자 계속 일할 수 있는 튼튼한 환경이다.
 
너는 여자 혼자라서 틀림없이 불행해질 거라며 겁을 주는 목소리보다 우리 각자 혼자이지만 그러니 느슨하게 손잡자고, 함께 지금까지 없던 미래를 상상해 보자고 대화를 건네는 존재들에게 더 귀를 기울이고 싶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이하 〈이로운 할머니〉)를 쓴 무루 작가도 나 같은 40대 비혼 여성이며, 혼자 늙어가다가 어쩌려고 그러냐는 염려를 참 많이 들어온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에 잠식되는 대신 단독자로 잘 늙어가기 위한 어른의 단단한 마음가짐을 궁리하고 실천하기에 그의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좋은 또래 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무루 작가는 스스로의 생활을 돌보는 좋은 습관을 가지기를, 타인에게 연민의 마음을 잃지 않기를, 덜 편협하고 더 유연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조카들에게 향수 어린 공간을 내어줄 수 있기를 희망하며 마침내 이렇게 적는다. ‘그러니 나는 조금 설레며 기다린다. 할머니가 되는 날을.’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려면 우선 스스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경제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기에 사람이 필요하다. 자녀나 손자녀 같은 수직적 혈연 대신 수평적 관계의 친구가, 문을 열고 나가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눌 이웃이 있으면 좋겠다. 〈이로운 할머니〉는 하나의 완성된 선택지로서 독신자들이 늘어나고 공존할 때, 마을이나 커뮤니티나 느슨한 가족의 모습을 이룰 때 비혼 노년이 반드시 고독하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다드래기 작가의 만화 〈안녕, 커뮤니티〉에서 자발적 비상연락망을 짜서 돌리는 마을 노인들도 이런 공동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혼이거나 사별했거나 이혼하거나 자녀가 있거나 없거나 한 채로 늙어가는 동네 친구들은 순서를 정해 아침마다 서로 안부를 확인하고, 무사함을 단톡방에 공유하며, 몸이나 마음이 아플 때 서로를 들여다보고 기댄다. 어쩌다 보니 멀지 않은 동네에 모여 살며 가끔 식재료와 반찬을 나누고, 같이 운동을 다니고, 집을 비울 때면 각자의 반려동물을 돌봐주는 내 친구들과도 이렇게 늙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미래의 1인 가구들, 할머니(Grandmother)가 아닌 할머니(Old Lady)들에게 필요한 건 결핍을 채워주는 가족이 아니라 결핍을 가진 채로 서로의 안녕을 지켜봐주는 커뮤니티다. 할머니가 되는 날을 설레며 기다리진 않더라도 두려움 없이 잘 준비하고 싶다.
 
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저자이자 운동 애호가. 오랜 시간 잡지 에디터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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