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그 시절의 우리는

돌이켜보면 모두 미숙하면서도 조급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우리는  

올해 대학수학능력 시험일은 11월 14일이다. 수능을 경계 삼아 인생을 반으로 접을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11월이 되면, 수험장을 향해 걸어가던 아침의 쌀쌀한 공기가 떠오를 때면, 가슴 한편이 짓눌리는 기분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기억은 그 장면에서 뚝 끊겼다. 어색하고 후련했던 졸업식은 아주 작은 파편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친구들과도 서서히 연락이 끊겼다. 과거보다 재미있는 게 많아졌다.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추억이 아니라 상처이기도 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던 성추행,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가 손에 꼽힐 만큼 부패했던 재단, 주말의 단체 기합, 부인을 때린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폭력적인 한문 교사, 제자와 결혼한 걸 자랑스럽게 떠들던 음악 교사…. 점점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모의고사가 끝나면 벽에 붙던 등수표와 우열반 명단, 수시 모집에 먼저 합격한 친구를 둘러싼 부러움과 시샘의 공기였다. 영화 <벌새>를 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는 구호로 가득 찬 교실 안에 내가 있는 것 같았다. 한번은 북 토크에서 고등학교 시절에 관해 이야기한 적 있다. 나도 모르게 “저는 연락하고 지내는 고등학교 친구가 한 명도 없습니다. 아마 그때 제가 너무 불행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무의식 속에 묻어둔 진심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함께 성장하는 대신 수능 날 하루를 향해 1년, 아니 평생을 걸고 달려야 했다. 내 자리는 누군가의 위 혹은 아래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끝에서 서로를 미워하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어쩌면 나만 그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수록 그 시절을 더 외면했고 나를 포함한 기억 속의 모두를 경멸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과거의 나 그리고 기억 속의 친구들과 화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딜리헙’에 연재 중인 웹툰 <극락왕생> 덕분이었다. 올해 최고의 만화로 꼽고 싶은 <극락왕생>은 26세에 죽어 ‘귀신’이 된 주인공 박자언이 다시 얻은 1년의 생을 지옥도에서 온 도명존자와 함께 보내며 귀신과 인간을 돕는 이야기다. 문제는 관음보살이 자언에게 돌려준 ‘가장 중요한 한 해’가 바로 고3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무자비할 수가! 다시 살아야 하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인생 최악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자언은 옛 친구들도 반갑지 않다. 수능 점수가 나온 이후 드러난 친구의 본심, 명확하게 알게 된 친구의 단점, 같이 놀기는 해도 언제나 속을 알 수 없었던 친구들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추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랍 한 칸만 한 교실에 아침부터 밤까지 꼼짝없이 갇혀 우리는 서로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간신히 참고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늘을 견디면 한 줌의 얘깃거리라도 남겠지 싶어서. 그런데 얘들아, 그거 알아? 우린 결국 얘깃거리조차 못 됐어.” 자언의 독백은 진실을 담고 있기에 아프다. 하지만 <극락왕생>은 10대 후반 여성의 우정이 얼마나 얄팍하고 진저리 처지는 것이었는지 세밀하게 비추는 한편 그것이 얼마나 다정하고 끈끈했는지, 그들이 왜 서로에게 상처를 주거나 실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언의 시선을 통해 차차 읽어낸다.
돌이켜보면 모두 미숙하면서도 조급했던 시절이었다. 매일 붙어 다니면서도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아이러니 때문에 마음속으로 선을 그었던 관계는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니 비로소 가까워졌다. 단짝 재경을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애라고 여기고 미워했던 자언은 문득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실컷 떠들어대던, 재경이의 다정한 낭만이 그 시절 자신을 버티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전교의 ‘인싸’인 친구 꽁지가 자언에게 처음으로 커밍아웃하는 순간은 동성애 혐오 분위기의 학교와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인이 되기만 기다리는 성소수자 여성 청소년의 존재를 선명하게 그려낸다. 보이는 것 이상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서서히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관계는 자언이 지민의 밝은 얼굴 뒤에 감춰졌던 외로움과 두려움에 다가서면서 지난 생과 달라진다.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의 우주가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각자의 우주에서 서로의 별세계를 짐작도 못한 채 살아가는 거지.” 사람이 이런 깨달음을 얻으려면 죽다 살아나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극락왕생> 덕분에 나 역시 늦었지만 알게 됐다. “좋다가도 밉고 한없이 얄미웠다가 세상에서 제일 정다웠다가 뜨겁다가, 차갑다가…(중략) 우리가 만난 게 한낱 고약한 변덕이었노라 하지만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바꿀 만큼 분주하게 사랑한 걸 수도 있는데.” 나야말로 좋았던 순간은 다 잊고 너무 오래 마음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이제야 그때의 친구들을 그리운 마음으로 떠올린다.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행복하기를. 만약 우리가 함께해서 좋았던 추억이 있다면 가끔 기억해 주기를. 
 
Writer 최지은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하며 글을 썼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선언하는 책 <괜찮지 않습니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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