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시절의 우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과거의 나 그리고 기억 속의 친구들과 화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딜리헙’에 연재 중인 웹툰 <극락왕생> 덕분이었다. 올해 최고의 만화로 꼽고 싶은 <극락왕생>은 26세에 죽어 ‘귀신’이 된 주인공 박자언이 다시 얻은 1년의 생을 지옥도에서 온 도명존자와 함께 보내며 귀신과 인간을 돕는 이야기다. 문제는 관음보살이 자언에게 돌려준 ‘가장 중요한 한 해’가 바로 고3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무자비할 수가! 다시 살아야 하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인생 최악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자언은 옛 친구들도 반갑지 않다. 수능 점수가 나온 이후 드러난 친구의 본심, 명확하게 알게 된 친구의 단점, 같이 놀기는 해도 언제나 속을 알 수 없었던 친구들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추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랍 한 칸만 한 교실에 아침부터 밤까지 꼼짝없이 갇혀 우리는 서로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간신히 참고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늘을 견디면 한 줌의 얘깃거리라도 남겠지 싶어서. 그런데 얘들아, 그거 알아? 우린 결국 얘깃거리조차 못 됐어.” 자언의 독백은 진실을 담고 있기에 아프다. 하지만 <극락왕생>은 10대 후반 여성의 우정이 얼마나 얄팍하고 진저리 처지는 것이었는지 세밀하게 비추는 한편 그것이 얼마나 다정하고 끈끈했는지, 그들이 왜 서로에게 상처를 주거나 실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언의 시선을 통해 차차 읽어낸다.
돌이켜보면 모두 미숙하면서도 조급했던 시절이었다. 매일 붙어 다니면서도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아이러니 때문에 마음속으로 선을 그었던 관계는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니 비로소 가까워졌다. 단짝 재경을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애라고 여기고 미워했던 자언은 문득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실컷 떠들어대던, 재경이의 다정한 낭만이 그 시절 자신을 버티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전교의 ‘인싸’인 친구 꽁지가 자언에게 처음으로 커밍아웃하는 순간은 동성애 혐오 분위기의 학교와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인이 되기만 기다리는 성소수자 여성 청소년의 존재를 선명하게 그려낸다. 보이는 것 이상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서서히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관계는 자언이 지민의 밝은 얼굴 뒤에 감춰졌던 외로움과 두려움에 다가서면서 지난 생과 달라진다.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의 우주가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각자의 우주에서 서로의 별세계를 짐작도 못한 채 살아가는 거지.” 사람이 이런 깨달음을 얻으려면 죽다 살아나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극락왕생> 덕분에 나 역시 늦었지만 알게 됐다. “좋다가도 밉고 한없이 얄미웠다가 세상에서 제일 정다웠다가 뜨겁다가, 차갑다가…(중략) 우리가 만난 게 한낱 고약한 변덕이었노라 하지만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바꿀 만큼 분주하게 사랑한 걸 수도 있는데.” 나야말로 좋았던 순간은 다 잊고 너무 오래 마음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이제야 그때의 친구들을 그리운 마음으로 떠올린다.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행복하기를. 만약 우리가 함께해서 좋았던 추억이 있다면 가끔 기억해 주기를.
Writer 최지은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하며 글을 썼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선언하는 책 <괜찮지 않습니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