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론 그래 봤자 겨우 판타지, 그것도 미래형 판타지이긴 하다. 기존 미디어의 젠더 감수성 테스트는 여전히 방어전만 치르고 있는 실정이다. 새삼스럽지만 미국 여성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1985년 남성 편중 서사를 계량화할 방법을 궁리해 개발한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를 거론해 보자.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한 화에서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두 명 이상인가? 2. 이 여성끼리 한 번이라도 대화를 하는가? 3. 그 대화 속에 남자 주인공에 관한 것이 아닌, 다른 주제의 내용이 있는가? 아니, 이름이 있고, 여성끼리 대화를 하는지, 이렇게 당연한 질문이 말이 되냐고? 그러나 아직도 많은 영화의 성평등 지수는 이 벡델 테스트 기준으로 분류되며, 심지어 거대 자본이 투입된 영화일수록 테스트를 통과하기 어렵다. 세계적인 시리즈 <스타워즈> 오리지널 3부작에서 레아 공주를 제외한 여자들이 말하는 장면은 상영 시간 386분 중 63초에 불과하고, 넷플릭스 ‘띵작’이라 불리는 <블랙 미러> 시즌 4는 페미니즘 관점에 충실하지만 이 테스트에 비춰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물론 테스트의 허점도 많다. 놀랍도록 퇴행적인 여성상을 보여준 <트와일라잇>은 달랑 벨라와 엄마의 대화 장면 하나로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만, 용감하고 똑똑하며 흥미로운 여주인공이 나오는 <그래비티>는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 성평등을 추구하는 연극인 단체 스핑크스도 1975년에 테스트를 만들었다. ‘무대 중앙에 여성이 있는가?’ ‘여성 캐릭터가 능동적인가?’ 등이 질문에 해당한다. 이 밖에 영화 <호빗>에 등장하는 엘프 여전사 ‘타우리엘’에서 유래한 타우리엘 테스트(Tauriel Test), 섹시한 램프 테스트(Sexy Lamp Test; 여성 등장인물을 ‘램프’로 대체해도 이야기에 지장이 없는가) 등이 있지만 어쩐지 미시적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해어화(말은 알아듣지만 할 수는 없는 꽃)’ 테스트라고나 할까.
우리는 여성 캐릭터의 진화를 앞으로 더 세게 밀어붙여야 한다. 캐릭터와 스토리텔링, 내러티브가 상상력을 촉진하고, 그 상상력이 미래를 선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여성 캐릭터의 가상 신체가 미디어를 넘어 남성 편향적인 현실 속에서 여성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서서히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 가상의 여성 캐릭터는 결국 현실을 바꿔낸다. 영화 <헝거게임> 시리즈의 제니퍼 로렌스는 남성과 동등한 임금을 요구하는 ‘페이 미투(Pay Metoo)’를 제기했다. 미드 <하우스 오브 카즈>의 로빈 라이트는 동료 케빈 스페이시와 동등한 임금을 요구했으며, 케빈 스페이시가 2017년 미투 폭로로 배우로서 커리어를 마감했다는 현실은 상징적이다. 그만큼 캐릭터를 통해 언어 자본을 나눠 갖는 것은 중요하다. 머지않아 우리는 벡델 테스트 같은 젠더 감수성을 뛰어넘어 종차별주의를 벗어나야 하는 감수성의 시대로 진입할 것이다. 그때 필요한 테스트는 어떤 모습일까? 이미 <작은 아씨들> <빨간 머리 앤> <하이디> 그리고 <소공녀> 등 150년 전에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작품들의 리스트를 참고하는 게 상상력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이원진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했고, 10년간 기자로 일했다. <니체>를 번역하고,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를 썼다. 철학이 세상을 해독하는 가장 좋은 코드라 믿는다.
* '엘르 보이스'는 지금을 사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입니다. 매주 목요일 업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