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일과 근속연수의 상관관계?

'빌라선샤인' 대표 홍진아가 생각하는 일

어린 시절, 장래희망을 쓰라는 질문 앞에 고민에 빠지곤 했다. 특히 학기 초에 부모가 원하는 직업과 내 장래희망을 함께 써오라는 숙제를 받으면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어제는 의사를 하고 싶다가 오늘은 탐정이 되고 싶고, 동시에 PD도 되고 싶은데 이 중에 대체 무엇을 써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알림장에는 부모님이 “너 OO 하고 싶다고 했잖아”라고 얘기해 주는 것을 써냈지만. 하고 싶은 것은 주로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이나 한창 재미있게 읽고 있는 소설 속 인물의 직업이었다. 왜 그렇게 장래희망이 자주 바뀌냐는 질문을 듣던 어린이는 스무 살이 넘으면 하고 싶은 게 좁혀지고, 서른 살이 넘으면 바뀌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살게 될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부모님이, 선생님이, 동네 언니들이,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이 그런 것처럼. 
하지만 그런 삶이 좀처럼 내게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건 서른을 넘기면서 알게 됐다. 서른이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전 세대처럼 대학을 졸업하면 어디든 취업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고, 취업하더라도 안정적인 조건으로 취업하는 일은 적었다. 인턴을 거듭하면서 정규직으로 전환되기를 기다리는 친구도 있었고,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공공기관에서 11개월짜리 계약만을 갱신하며 일하는 친구도 있었다. 취업한다고 해도 저성장 시대의 직장인이 안정적인 미래를 꾸리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매년 ‘월급을 00년 모아야 아파트를 살 수 있다’는 조사 결과에서 나오는 00년의 숫자가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세상, 그러니까 결국 상속이 아닌 방식으로 내 재산을 만드는 것이 요원한 시대의 직장인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에 대한 충성 대신 내 욕구를 더 들여다보는 밀레니얼 노동자가 돼 그에 걸맞은 일을 찾기 시작했다. 자주 ‘이 일이 나를 성장시키고 있는지’ ‘일이 내게 흥미와 동력을 가져다주는지’ 체크했고, 일하는 내가 일을 통해 더 나은 무언가, 그게 돈이든 재미든 보람이든 실력이든, 내 욕구가 닿아 있는 어떤 것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판단이 들면 그 다음 직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길게는 2년, 짧게는 11개월 정도의 경험이 모인 커리어 패스를 이어나갔다. 한번은 제안을 받고 면접을 보는 자리에 갔다. 면접관이 “진아 님도 이제 한 회사에 정착하셔야죠, 앞으로를 위해서”라고 얘기했다. 어쩌면 ‘진득하게 커리어를 쌓아나갈 우리 회사로 오라’는 메시지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말 덕분에 나는 이 회사와 일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앞으로도 저는 진득하게 일하기보다 재미있게 일하고 싶어요”라고 받아쳤고, 근속연수로 내 전문성과 가능성을 판단하는 회사와 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에 잠잠했던 불안이 올라올 때마다 면접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렇게 짧은 경험을 이어가면서 일해도 괜찮을까. 누군가 보기에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경험들이 나열돼 있는 내 이력서로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한 회사에 오래 근무하면 커리어가 쌓일까? 이제는 이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다양한 이유들, 특히 사회경제적 이유로 한 직장에서 ‘진득하게’ 커리어를 쌓아가지 못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자신만의 전문성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특히 남녀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기 더 어렵고, 이를 유지하는 것 역시 어려운 여성들에게 이 질문은 더 중요하다. 자꾸 분절되는 일의 경험을 무엇으로 이을 수 있을지, 이것을 어떻게 커리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커리어’라는 말의 어원을 찾아보면 ‘말이 달리는 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평생 직장’이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커리어라는 단어가 말이 달릴 수 있도록 쭉 이어진 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마다 커리어를 만드는 방법도 다르고, 삶에서 일을 정의하는 방식도 다르다. 또 쌓아나가는 일에 대한 경험 역시 어딘가 이어지지 않고 끊겨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 밀레니얼 세대가 만들어나가는 커리어 패스는 오히려 별자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연구원, 프로젝트 매니저, 캠페이너,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등 얼핏 봐서는 잘 이어지지 않는 각각의 일 경험을 나라는 선으로 이어진 각기 다른 별자리. 이미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별자리들을 기존의 문법대로, 억지로 하나의 길에 짜맞춰 설명할 수 있을까? 내 커리어를 폄하하는 대신에 그 경험들과 이어진 나, 내가 가진 일과 관련된 전문성, 탁월함, 나만 아는 한 끗을 찾는 데 시간을 써야 한다. 이것이 나를 지키며 계속 일해나갈 수 있는 방법이다.
나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이렇게 많은데 왜 장래희망은 하나여야 할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다. 장래희망이 직업이라는 단어로 바뀌었을 뿐. 이 질문이 철없어 보여 한때는 아닌 척하기도 했지만, 계속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120세 시대를 살아야 한다는데, 한 가지 일만 해야 한다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이 질문을 가진 사람들을, 그리고 이미 질문대로 살아가고 있는 동료를 더 많이 만나고 싶다. 각자가 그려가는 자신만의 일 이야기를 듣고 싶다. 어쩌면 우리로 인해 장래희망을 하나만 골라야 하는 어느 초등학생의 고뇌하는 시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홍진아
밀레니얼 여성들의 일과 삶을 위한 커뮤니티 서비스 ‘빌라선샤인’ 대표. 여덟 명의 여성 창업가를 인터뷰해 <나는 오늘도 내가 만든 일터로 출근합니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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