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목숨에 무게가 있다면
2019.09.05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범죄에 대해 잔인함의 서열을 매기는 것이야말로 정말 잔인한 일이다. 그러나 왜 어떤 사건에는 ‘최악의’ ‘역대 가장 끔찍한’ 같은 수식어가 의심 없이 붙을까. 대중의 혐오와 호기심에 불을 붙인 건 물론 미디어들이다. <세계일보>의 ‘최초 공개 고유정 긴급체포’ 영상은 유튜브 조회 수 100만을 넘겼다. 고유정의 신상이 공개된 6월 5일부터 약 두 달간 한 포털 사이트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 기사는 9000여 건, 그중에는 ‘고유정, 평소엔 귀염상?’ ‘한껏 치장한 고유정’ ‘고유정의 일상 속 환한 미소’ 등 가십성 기사도 적지 않았다. 고유정 사건이 아무리 잔혹하다 한들 부인을 살해한 남편에 관한 미디어의 관심도 이 정도일까? 정치인 출신이기에 실명이 알려진 유승현 전 김포시의회 의장은 지난 5월 부인을 주먹과 골프채로 때려죽인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이 사건에 관한 기사는 500건이 조금 넘는다. 지난해 10월,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처를 살해하고 도주한 김종선의 이름과 얼굴 사진을 온라인에 공개한 것은 그의 세 딸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오랜 기간 폭력과 학대를 견뎠던 그들은 수사기관에 범인의 신상 공개를 수차례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아 자신들이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의 실명이 실린 기사는 수십 건에 불과하다.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 따르면 경찰이 강력범죄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했으며 충분한 증거가 있고 공공 이익을 위하며 청소년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다. 지난 5월, 순천의 30대 남성 정 모 씨는 회사 선배의 약혼녀가 사는 아파트에 침입해 성폭행을 시도하다 피해자가 6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리자, 화단에 추락한 피해자를 다시 집으로 끌고 들어와 성폭행한 뒤 살해했다. 3월에는 군산의 50대 남성 A 씨가 부인을 강간 후 살해하고 농로에 유기한 뒤 도주했다. 이들이 성범죄 전력으로 이미 전자 발찌를 착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했고, 우리는 여전히 이들의 이름과 얼굴도 알지 못한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2009년부터 매년 남편과 연인, 전남편을 비롯한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게 살해당하는 여성의 숫자를 발표한다. 가장 최근인 2017년의 숫자는 85명. 그나마 언론에 보도된 사건만 분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성이 여성 한 명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거나 온 국민에게 신상이 공개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8월 2일에는 광주에서, 6일에는 용인에서 남성이 연인 사이였던 여성을 살해했다. 이 사건들은 화제조차 되지 않았다. 1977년 SF 작가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이 지구 곳곳에서 전염병처럼 퍼지는 남성들의 여성 살해 현상을 그린 작품 <체체파리의 비법>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한 남자가 아내를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지만, 충분히 많은 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생활방식이라고 부른다.” 지금 내가 사는 이 사회는 어떨까. 한 여자가 남자를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 남자가 여자를 죽이면 그 앞에는 ‘묻지 마’ ‘왜 안 만나줘’ ‘우발적으로’ ‘술김에’ 같은 표현들이 붙는다. 어쩜 우리는 ‘동일 목숨, 동일 무게’를 먼저 외쳐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지은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하며 글을 썼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렇지 않았음을 선언하는 책 <괜찮지 않습니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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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최지은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딩크 여성들의 삶을 인터뷰한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펴냈다. 늘 행복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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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최지은
- 에디터 이마루
- 디자인 오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