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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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를 너무 객관적으로 봐서 괴롭고, 가끔은 자의식이 비대해져 객관성을 잃어서 괴롭다. 요즘 나는 왜곡된 거울을 들고 나를 비쳐본다. 이렇게 내가 별로라고 느낀 적은 실로 오랜만이다. 방송하고 난 후에 내가 어떻게 방송을 했는지 볼까 말까 망설이다 겨우 내 모습을 볼 정도다. 한창 방송을 물 흐르듯 했던 시기가 있는가 하면, 지금은 뭔가 껄쩍지근한 나사가 끼어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못마땅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예전엔 집중력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요즘은 말이 입 안에서 뭉개지는 때가 있다. 멘트를 하고 나서 왜 이 정도밖에 못했는지 종종 자책한다.


외적으로도 묘하게 달라졌다. 한땐 실물보다 방송이 잘 나온다 싶은 때도 있었는데, 그 싱그러운 반짝거림이 줄어들었다. 일과 육아를 오가며 얼굴에 팩을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나가는 일상에서 어떻게 사람이 반짝이기까지 하겠느냐마는. 내가 지금 무언가 허둥대고 있다는 걸 제작진도, 시청자도 알 것 같은 부끄러움이 수시로 밀려온다. 방송은 사람이 가진 ‘에너지’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 에너지를 잃으면 끝인 것을…. 지금 나는 방송을 업으로 하는 프로로서 직무유기인가? 이럴 때면 괜히 휴직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하지만 내가 출산휴가를 마치고 곧바로 일터로 돌아온 이유가 있는걸. 누구나 겉으로는 별다른 문제없이 지내고 있는 것 같지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자신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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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내 앞에는 해야 할 일이 명확했다. 임신 동안엔 뭔가 더 하지 않아도 몸에서 중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고, 난생처음 느껴보는 변화로도 경이로움을 느꼈다. 첫아이를 낳고 복직한 후의 목표 역시 일과 가정의 양립이었다. 미끄러지거나 망하지 않으면 성공이라고. 이미 풀 가동돼 돌아가는 일상에서 선택지가 별로 없는 상황은 나처럼 뭔가를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에겐 인생 처음으로 주어지는 단순한 일상이었다. 둘째 출산휴가를 마치고 복직한 후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마침내 나는 40대가 됐고, ‘앞으로 망망대해 같은 인생의 지도에서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어느새 묘하게 고인 물이 돼버린 느낌 역시 끈덕지게 따라왔다. ‘변화해야 하지 않겠어?’ 사람이 변화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괴로워진다. 익숙한 상황을 흔들어 무언가 바꿔야 한다는 걸 의미하니까.


어느 날 선배를 만나 이런 마음을 토로했다. “요즘 저는 이것도 저것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요. 뭘 하든 마음에 안 들어요.” 나를 잘 아는 선배는 곧장 진단서를 펼쳤다. “현주야, 진심을 좀 덜어.” 선배 말에 따르면 나는 눈앞에 있는 일이나 사람에게 너무 진심이라 스스로 만족할 만큼 다하지 못했을 때 쉽게 괴로워한다고 했다. 맞다, 내 고질병이었지. 좋아하는 일에, 잘하고 싶은 일에 너무 진심이어서 자주 지쳤지. 조금 덜 진심일 때 일이 더 잘 풀리고 관계가 유연해졌다는 걸 모르지 않는데. 지금 필요한 건 ‘더 힘을 내!’가 아니라 ‘진심 좀 덜고 릴랙스하라’는 말임을.


“그리고 이걸 잊지 마. 다른 사람들은 네가 그렇게 허우적대는 줄 몰라. 정말 몰라. 왜냐하면 다들 자신의 일에 가장 관심이 많고, 남의 일엔 보기보다 관심이 없거든.” 역시 내 자의식이 비대했던 걸까? 그날 밤, 이런 스스로를 잠시 끌어안기로 결심했다. 진심을 다하는 것까지는 오케이, 진심 이후의 결과는 너무 확대 해석하지 않기. 지금이 못마땅하다고 도망쳐 버리면 미래의 내가 슬퍼할지도 몰라. 기분에 휩쓸리지 않고 정말 필요한 순간에 멈춤을 선택하기로 했다. SNS로 다른 사람의 괜찮아 보이는 일상도 들여다보지 않기로, 언제나 운동은 특효약이기에 헬스장도 끊기로 하며. 올여름은 진심 좀 덜어내고, 조금 더 가볍게 건너가기로 한다. 이번만은 진심으로 진심 덜기.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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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주

듣고, 쓰고, 읽고, 말하는 MBC 아나운서. 좋아하는 것을 하며 신중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부지런한 나날을 담은 책 〈아낌없이 살아보는 중입니다〉〈우리는 매일을 헤매고 해내고〉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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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전혜진
  • 아트 디자이너 이아람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