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맥시멀'한 몰입을 향해
202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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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 같은 이를 지칭하는 단어를 발견했다. ‘딜레탕트’. 이탈리아어로 ‘즐긴다’는 의미인 ‘딜레토(Diletto)’에서 파생된 용어로 교양인과 예술애호가,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아마추어를 두루 포함한다. 나는 확실히 새로운 단어나 개념, 인류가 밝혀낸 새로운 연구 성과를 알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공유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가끔 종횡무진하는 호기심에 지치기도 하지만, “이렇게 다방면에 관심 있는 삶도 나쁘지 않다”며 자위하기도 했다. 얼마 전 이런 위로에 죽비가 내려쳤다. 치죽비를 든 스승은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한국 여성 과학자들이다. 데이팅 과학 분야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사관학교’라 불리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 보안 및 정보보안 분야 단장으로 부임한 차미영 카이스트 전산학부 교수, 위성 항법 분야 업적으로 한국인 최초로 미국항법학회의 터로(Thurlow) 상을 거머쥔 이지윤 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그리고 뇌를 전기회로도처럼 분석하는 연구를 인정받아 한국인 여성 최초로 스탠퍼드 대학교 종신교수로 임명된 이진형 스탠퍼드 신경외과학 겸 생명공학과 교수 등. 자신의 분야에서 뚜렷한 성과를 냈고, 그 공으로 인류를 이롭게 하는 이들은 놀랍게도 모두 40대 중반의 젊은 여성이다.
한류가 ‘대세’인 예체능 분야와 달리 학문에 있어서는 유독 한류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연구계의 자성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생겨난 이 토종 여성 학자들의 눈부신 실적은 자신의 전부를 연구로서 증명해 낸 데서 온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성과는 그들이 이뤄낸 수많은 몰입의 순간, 그 몰입의 순간에 일어나는 장기 기억을 만들기까지 수없이 반복하고 실패했을 절차 기억, 즉 ‘반복’에 바탕을 둔 것일 테다. 분산의 욕망을 이겨내고, 지루한 일상의 반복을 억척스럽게 해내다가 어느 순간 마지막 연구를 완성했을 때 엄청난 희열을 맛봤을 것이다. 어쩌면 예전의 메모 한 장을 통해 지루한 순간에 고뇌의 글을 썼던 시간을 되돌아보며 갑작스럽게 눈물을 쏟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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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우주와 뇌만큼 광활하고 ‘맥시멀’한 탐구 대상이 있을까? 그 맥시멀한 분야에서 미니멀한 삶의 원칙으로 어마어마한 결과를 이끌어낸 여성들이 더없이 근사하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매일 수없이 여러 군데서 발발하는 내 호기심이 문제는 아니다. 그 호기심을 단순한 원칙으로 잘 조련해 나를 반복시켜 뭔가를 이뤄내는 끈기가 중요한 것이다. 이럴 때 로마의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원칙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아이는 사탕이 가득 든 유리병에 손을 집어넣고 한 움큼 쥔 주먹이 병 입구에서 빠지지 않아 울기 시작합니다. 사탕을 몇 개 손에서 떨어트리면 되는데! 너무 많은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그러면 필요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딜레당트처럼 살아가겠지만, 그래도 이제 질문하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지금 이 책을 읽는 것이 꼭 필요한가? 지금 이 순간 나는 계속 글을 쓰고 있는가?” 이 ‘미니멀’한 질문은 균형을 잃고 스스로 자책하는 불필요한 일로부터 나를 ‘맥시멀’한 몰입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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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번역하고,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를 썼다. 현재 연세대학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학이 세상을 해독하는 가장 좋은 코드라고 믿는 워킹 맘. 이원진
Writer

이원진
〈니체〉를 번역하고,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를 썼다. 현재 연세대학교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학이 세상을 해독하는 가장 좋은 코드라고 믿는 워킹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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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이마루
- 글 이원진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