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있나요? 시끄러울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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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울 의지


친구들이 말수가 줄었다. 지친 것 같다. 괴로운 회사 이야기나 고민을 덜 공유하고, 차라리 노트를 찢어 빙고 게임을 한다. 안 그래도 피폐한 시국에 서로에게 근심을 더하지 않으려는 배려이기도, 내 피로를 건네지 않고 타인의 피로도 건네받지 않겠다는 생존 방책이기도 할 것이다. 최근 세계은행이 발표한 2024년 <여성, 비즈니스, 법>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이 누리는 권리는 남성의 64%다. 세계 190개 국가의 법률적 성평등을 평가하는 이 조사는 올해 처음으로 안전 문제와 육아 부담 차이를 고려 항목에 포함했는데, 안전 면에서 법률적 권리만 따지면 여성의 권리는 남성의 36%였다. 심지어 현실은 이런 법적 평가보다 훨씬 나쁘다. 법률상 권리가 실제로 행사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성별에 따라 인사 평가를 자의적으로 조정하는 관리자에게 “그거 불법입니다”라고 지적하면 일이 순리대로 처리될까? 그런 환경에서는 오히려 지적한 사람이 배척될 가능성이 높다. 법이 보장한 여성의 권리를 지킬 실질적 장치를 갖춘 나라는 전체의 40%에도 미치지 못한다.

같은 날에 읽은 다른 기사에는 ‘사상 검열’로 해고당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한 여성은 “사회 문제는 모두 메갈이 일으킨다”는 남성 동료의 말에 “차별에 항의하는 여성에게 메갈 딱지를 붙이는 게 문제”라고 답했다가 동석했던 남성 상급자에 의해 다음날 해고됐다. 앞의 발언이 아니라 뒤의 발언을 한 사람이 해고됐다. 마침 이 기사가 뜬 날 북 토크가 있었다. 한국 2060 여성들의 일 경험을 분석한 문화인류학자 김현미 교수의 책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로 개최한 두 번째 북 토크로, 나는 책의 발행인이자 편집자로서 진행을 맡았다. 토크 참여자들의 설문조사에서 가장 비중이 높았던 고민 중 하나는 “직장에서 성차별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였다. 여성들이 모여 이런 이야기를 하면 ‘분란을 일으키지 않게끔 좋게 좋게’ 지적하는 노하우들이 공유되곤 한다. 이날의 북 토크도 그랬다. 불의에 항상 분연히 맞서야 한다는 부담은 좀 덜어도 좋지만, 침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상처 입히며 살 수는 없기에 끝없이 적절한 대응 전략을 연구한다. 차별의 언어를 뱉는 상사에게 밉보이지 않을 정도로, 동시에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정도로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들 말이다. 차별주의자들은 “사회 문제는 모두 메갈이 일으킨다”는 소리를 해도 아무 제재를 받지 않지만, 그것에 상식적 반박을 하는 여성은 ‘사상이 맞지 않는다’며 해고되기 때문이다. 북 토크 중 저자 김현미 선생님은 이 기사에 분통을 터뜨렸다. “차별하는 이들은 언제나 틀린 말을 너무 쉽게 뱉는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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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는 것은 권력이다. 무지한 말을 해도 위협받지 않기에 계속 무지한 말을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쪽과 그렇지 못한 쪽의 차이가 존재한다. 현명한 말을 해도 생존을 위협받는 이들에게 말하기란 위험한 과업이다. 자신의 기본권을 부정하는 말을 하는 상대에게조차 웃어 보여야 하는 이들이 지치는 건 당연하다. 쉽게 뱉어내는 억지소리에 지식과 사회성을 끌어모아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일방적인 노동이기 때문이다. 이 발화 권력 차이로 인해 특정한 침묵이 확산한다. 누군가는 너무 쉽게 많은 말을 하고, 누군가는 말하기를 단념한다. 침묵은 들리지 않는다. 한편 성찰하지 않아도 되는 권력을 지닌 이들의 부적절한 말은 ‘쩌렁쩌렁’ 들린다. 그게 지금 우리 사회인 듯하다. 몰상식한 말의 향연을 보면서 침묵하는 다수의 상식을 애써 상상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지경이다. ‘아무 말 안 하지만 저 사람도 이게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크게 틀린 상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침묵하는 이들은 대화할 수 없다. 침묵하는 개인들은 권력 앞에서 혼자가 된다.

책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는 그렇게 파편화되는 여성들의 일터를 그린다. 책에 인용된 여성들은 직업도, 성향도 각각이지만 지쳐가는 동시에 일터에서 인정을 갈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북 토크에 참여한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참여자의 90.9%가 “나에게 일이란 삶의 큰 부분이며, 직업적 성취와 존중을 얻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렇기에 침묵하지 않고 존엄을 구하면서도 계속 일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문제가 보이지만 문제를 언어화하지 않겠다고 많은 여성이 결심한 듯 보인다”라는 책의 이 문장은 아픈 현실이다. 다만 이는 개인의 결심이라기보다 사회가 여성들에게 배당한 침묵이라는 것 역시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편집자로서 이 책을 만들면서 바란 것은 하나다. 일하는 여성들이 구조를 겨냥하고 공통 문제에 대해 대화할 수 있게 되기를. 책은 한국의 직장에서 여성들이 처한 구조적인 곤경과 감정 상태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지도다. 여기서 침묵하던 파편들은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함께 행동해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나는 점점 눈에 띄게 분노할 기력을 잃어가는 친구들과 언제든 핏대를 세워가며 떠들 수 있기를 바란다. 정돈되지 않은 분노들, 말하자면 복잡하고 피로하기에 점점 마음속에 가둬두고 꺼내지 않는 생각들을 나누고 싶다. 평화롭고 안전한 웃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존중받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이를테면 동료 시민 남성의 64% 미만 정도로. 많은 순간에 침묵은 미덕이지만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는 해법이 될 수 없다. 기본권이 다르게 주어질 때 침묵으로는 존엄을 지킬 수 없다. 지난해 기노쿠니야 서점 인문대상을 수상한 작가 다카시마 린은 이렇게 썼다. “침묵만큼 내버리기 쉬운 건 없다. 얼마나 큰 괴로움을 겪은 끝에 나온 침묵이든 간에 그것은 나를 괴롭히는 장본인들에게 유리한 태도가 된다”고.


이두루

페미니스트 출판사 봄알람 대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을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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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루

출판사 ‘봄알람’ 대표. 베스트셀러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 이슈를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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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이마루
  • 글 이두루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