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있나요? 시끄러울 의지
2024.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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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울 의지
같은 날에 읽은 다른 기사에는 ‘사상 검열’로 해고당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한 여성은 “사회 문제는 모두 메갈이 일으킨다”는 남성 동료의 말에 “차별에 항의하는 여성에게 메갈 딱지를 붙이는 게 문제”라고 답했다가 동석했던 남성 상급자에 의해 다음날 해고됐다. 앞의 발언이 아니라 뒤의 발언을 한 사람이 해고됐다. 마침 이 기사가 뜬 날 북 토크가 있었다. 한국 2060 여성들의 일 경험을 분석한 문화인류학자 김현미 교수의 책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로 개최한 두 번째 북 토크로, 나는 책의 발행인이자 편집자로서 진행을 맡았다. 토크 참여자들의 설문조사에서 가장 비중이 높았던 고민 중 하나는 “직장에서 성차별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였다. 여성들이 모여 이런 이야기를 하면 ‘분란을 일으키지 않게끔 좋게 좋게’ 지적하는 노하우들이 공유되곤 한다. 이날의 북 토크도 그랬다. 불의에 항상 분연히 맞서야 한다는 부담은 좀 덜어도 좋지만, 침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상처 입히며 살 수는 없기에 끝없이 적절한 대응 전략을 연구한다. 차별의 언어를 뱉는 상사에게 밉보이지 않을 정도로, 동시에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정도로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들 말이다. 차별주의자들은 “사회 문제는 모두 메갈이 일으킨다”는 소리를 해도 아무 제재를 받지 않지만, 그것에 상식적 반박을 하는 여성은 ‘사상이 맞지 않는다’며 해고되기 때문이다. 북 토크 중 저자 김현미 선생님은 이 기사에 분통을 터뜨렸다. “차별하는 이들은 언제나 틀린 말을 너무 쉽게 뱉는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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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는 그렇게 파편화되는 여성들의 일터를 그린다. 책에 인용된 여성들은 직업도, 성향도 각각이지만 지쳐가는 동시에 일터에서 인정을 갈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북 토크에 참여한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참여자의 90.9%가 “나에게 일이란 삶의 큰 부분이며, 직업적 성취와 존중을 얻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렇기에 침묵하지 않고 존엄을 구하면서도 계속 일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문제가 보이지만 문제를 언어화하지 않겠다고 많은 여성이 결심한 듯 보인다”라는 책의 이 문장은 아픈 현실이다. 다만 이는 개인의 결심이라기보다 사회가 여성들에게 배당한 침묵이라는 것 역시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편집자로서 이 책을 만들면서 바란 것은 하나다. 일하는 여성들이 구조를 겨냥하고 공통 문제에 대해 대화할 수 있게 되기를. 책은 한국의 직장에서 여성들이 처한 구조적인 곤경과 감정 상태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지도다. 여기서 침묵하던 파편들은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함께 행동해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나는 점점 눈에 띄게 분노할 기력을 잃어가는 친구들과 언제든 핏대를 세워가며 떠들 수 있기를 바란다. 정돈되지 않은 분노들, 말하자면 복잡하고 피로하기에 점점 마음속에 가둬두고 꺼내지 않는 생각들을 나누고 싶다. 평화롭고 안전한 웃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존중받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이를테면 동료 시민 남성의 64% 미만 정도로. 많은 순간에 침묵은 미덕이지만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는 해법이 될 수 없다. 기본권이 다르게 주어질 때 침묵으로는 존엄을 지킬 수 없다. 지난해 기노쿠니야 서점 인문대상을 수상한 작가 다카시마 린은 이렇게 썼다. “침묵만큼 내버리기 쉬운 건 없다. 얼마나 큰 괴로움을 겪은 끝에 나온 침묵이든 간에 그것은 나를 괴롭히는 장본인들에게 유리한 태도가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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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출판사 봄알람 대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을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이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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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루
출판사 ‘봄알람’ 대표. 베스트셀러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 이슈를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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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이마루
- 글 이두루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