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나는 일보다 크다

기억하자. 나는 언제나 일보다 크다.

살면서 맞이하게 되는 고비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고비를 지나는 옆사람에게 나는 어떤 존재가 돼줄 수 있을까요? 씩씩하게 살아남아 함께 멋진 할머니가 된 미래를 그려보며, 〈엘르〉가 여성의 목소리로 세상의 단면을 전합니다.
에디터 이마루 
 

나는 일보다 크다

모두가 클럽하우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던 지난 설 연휴, 나 또한 그곳에 있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계속되고 있어 가족끼리 모임을 자제하는 분위기여서 유례없이 한산하고 조용한 연휴였지만, 그래서인지 클럽하우스는 더욱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북적거렸다. 방들의 주제는 다양했다. 성대모사를 하는 방부터 지역 기반 모임,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모임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많았던 건 역시나 ‘일’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방들이었다. 실리콘 밸리 투자자들이 창업가들에게 자기만이 알고 있는 투자 노하우를 알려주고, 대형 IT회사에서 일하는 서비스 기획자들이 클럽하우스의 미래를  논하기도 했다. 시간과 관심을 쏟기만 한다면 평소에 알고 싶었던 분야에 대해 듣고, 내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의 판이 열렸다.
 
문제는 그 판이 연휴 내내 계속된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들어가도, 점심에 들어가도, 한밤중에 들어가도 일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얘기를 들은 것도 아니고, 방마다 쓰인 제목만 훑어보는데도 피곤하고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닐까? 늦은 시각, ‘일하는 여성들에게 필요한 아이템 추천’ 모임의 제목을 보고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일하는 여성들에게 필요한 건 연휴 때 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일 거라고. 쉬는 날에도 자기계발과 능력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 삶이, 행여 새로운 이야기를 놓칠까 전정긍긍하는 삶이 과연 건강할 수 있을까.
 
사회안전망이 단단하지 않고, 노동 소득이 삶을 꾸려가는 근간이 되는 밀레니얼에게 일은 언제나 중요하다. 나아가 결혼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고, 스스로 가장이 돼 살아가는 밀레니얼 여성에게 일이 가지는 의미는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 크다. 이렇다 보니 삶을 유지하게 하는 원천이나 자아 실현의 도구였던 일이 원천이나 도구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목적이 돼버린다. 일을 잘하기 위해 내 시간의 대부분을 일에 쏟고, 나머지 시간은 전문성을 쌓기 위해 배우거나 누군가를 만나는 데 쓴다. 일 중심 사회에서의 전문성은 일을 잘하게 해주는 수단이 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 재화이기 때문에 연마할수록 내 가치는 커지고, 이것을 더 갖기 위한 쉼 없는 삶이 계속된다. 그러나 그 끝에는 끝없는 성장보다 다른 이름이 놓이기 일쑤다. 바로 ‘번아웃’이다.
 
나 역시도 이런 순환 고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일을 통해 유능함을 느끼고,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거나 존재 의미를 신경 써서 찾아야 하는 시간을 보내곤 하기 때문이다. 하루를 충만하게 살았다는 감각을 느끼는 일도 일이 잘됐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을 때가 많다. 이런 생각의 습관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쁘게 일하다 보면 일과 나를 분리하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기 쉽지 않다.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페미니스트 사라 자페는 지난 1월에 발매한 책 〈일은 당신에게 보답하지 않는다 Work Won’t Love You Back〉를 통해 밀레니얼의 과도한 일 사랑을 지적했다. 이 과열된 현상이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불안을 부추기는 사회가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경쟁을 부추기며 외롭게 만드는 사회에 맞서 내 옆의 사람들과 연결돼 우리 모두 느끼는 불안을 공동의 불안으로 함께 다룰 필요가 있다고. 일에서 목표와 의미를 더 이상 찾지 못할 때 찾아오는 번아웃을 다루기 위해서는 나와 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 사회 구성원으로서 내 역할과 의미를 찾으려는 생각의 습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그러나 나와 일의 관계를 잘 맺는 것은 더 중요하다. 내 일의 목표와 의미를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일하는 내 이야기를 다시 써야 한다. 기억하자. 나는 언제나 일보다 크다.
 
홍진아 밀레니얼 여성의 일과 삶을 위한 커뮤니티 서비스 ‘빌라선샤인’을 운영했다. 여덟 명의 여성 창업가를 인터뷰해 〈나는 오늘도 내가 만든 일터로 출근합니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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